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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만춘 묘

□ 소재지 : 북내면 장암리
□ 시 대 : 조선

원만춘(1626~1697)은 숙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 자는 군시(君始), 호는 용인재(用因齋)이다. 충장공 원호의 증손이자 좌의정 원두표의 아들이며 황해도관찰사 원만석의 동생이다. 병자호란 후 청(淸)이 조선의 공경(公卿) 자제를 인질로 끌고 갈 때, 자청(自請)해서 심양(瀋陽)으로 들어갔으며 2년간 억류 생활을 하다가 환국(還國)하였다. 1653년(효종 4) 영고별검(氷庫別檢)을 제수 받은 후, 여러 요직을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이르렀다. 경종대(景宗代)에 이조판서를 지낸 권상유(權相游, 1656~1724)가 그의 사위이다.

묘는 장암리 고래골의 오소산(梧巢山) 줄기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38, 폭 87, 두께 39), 상석(높이 28, 폭 146, 두께 94), 향로석(높이 42, 폭 40, 두께 32), 망주석(높이 171, 폭 42, 두께 42)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혼유석의 윗면에 단정한 글씨로 “용인재(用因齋) 원공묘(元公墓)”라 쓰고 뒷면에 “공휘만춘(公諱萬春)”이라 써 놓았다. 혼유석에 피장자의 신원을 기록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어 조선시대 석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리고 상석 앞면과 좌우면에 “조선(朝鮮) 한성우윤(漢城右尹) 원공묘(元公墓) 정부인(貞夫人) 함양박씨(咸陽朴氏) 부좌(祔左)”라고 깊게 각자되어 있어 단분(單墳)으로 조성된 봉분에 부부가 합장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상석의 색깔이 검게 변색된 것은 대리석이 산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판단된다. 또한 사각 향로석에는 안상(眼象)과 복련(覆蓮)을 장식하고, 팔각 망주석의 주신(柱身)에는 다람쥐를 조각하였다.

한편 봉분의 우측에는 당당한 풍채를 지닌 방부개석 양식의 묘갈(총 높이 약 254)이 건립되어 있다. 백대리석 비신(높이 150, 폭 71, 두께 34)의 상단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원공(元公) 묘갈명(墓碣銘)”이라고 대사성(大司成)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이 쓴 전액이 올려져 있어 비석의 종류가 묘갈임을 알 수 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여(李畬, 1645~1718)가 지은 묘갈문을 손자인 원명직(元命稷, 1683~1725)이 비신의 사면(四面)에 경건하게 썼으며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추기(追記)는 원백손(元百孫)이 지(識)하였으나 서자(書者)는 기록하지 않았고,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팔십팔년(八十八年) 을미(乙未, 1715, 숙종 41) 시월(十月) 일(日)”이다. 문양을 일체 장식하지 않은 방부(높이 67, 폭 121, 두께 83) 밑으로 기단석(높이 8, 폭 161, 두께 127)을 마련하여 기초를 튼튼히 하였으며 개석(높이 37, 폭 106, 두께 79)에는 비문 보호에 적합한 팔작지붕을 얹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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