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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환 묘

□ 소재지 : 여주시 신진동
□ 시 대 : 조선

성환(1655~1734)은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 자는 계휘(季輝), 호는 유촌(柳村) 또는 오일당(五一堂)이며, 조선초의 명신인 정평공(靖平公) 성석연(成石珚)의 후손이자 영평현령(永平縣令) 성신구(成信耉)의 손자이며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성후주(成後周, 1612~1679)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예(文藝)가 숙성(夙成)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679년(숙종 5) 중형(仲兄)인 성환(成瓘, 1643~1714)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아갔으며 1690년(숙종 16) 문과급제하여 승문원전적(承文院典籍)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각조의 낭관(郎官)과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단천(端川), 청송(靑松) 등의 수령을 지냈으며 좌통례(左通禮)와 공조참의를 거쳐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도성(都城)의 남산(南山) 아래에다 서재(書齋)를 마련하여 경전(經傳)을 탐구하고 논해(論解)한 글이 『유고(遺稿)』 6권으로 남아 전하며,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묘는 신진동 큰매골의 나지막한 구릉에 동향(東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3, 폭 89, 두께 35), 상석(높이 47, 폭 154, 두께 95), 향로석(높이 45, 폭 38, 두께 29), 망주석(높이 171, 폭 34, 두께 32)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팔각 망주석의 주신에 조각된 좌측 다람쥐는 위로 향하고 우측은 아래로 내려가는 변화를 주었다. 문인석과 장명등은 최근에 추설(追設)하였다. 2명의 부인과 함께 모신 삼위합폄(三位合)의 봉분에는 새롭게 원형의 호석을 둘렀으며 그 좌측에는 1999년에 신설한 묘표가 세워져 있다. 또한 봉분의 우측에는 방부개석 양식의 묘갈이 건립되어 있다. 묘갈문의 갈제(碣題)는 “유명조선(有明朝鮮)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오위도총부부총관(兼五衛都摠府副摠管) 성공(成公) 묘갈명병서(墓碣銘幷序)”인데 그 서두에 “정헌대부(正憲大夫)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사마동년(司馬同年) 이의만(李宜晩) 팔십칠(八十七) 찬(撰)”과 “가의대부(嘉義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춘추관사(兼春秋館事) 사마동년(司馬同年) 남취명(南就明) 칠십육(七十六) 서(書)”라 되어 있어 성환과 같은 해 사마시에 합격했던 이의만과 남취명이 각각 87세와 76세에 묘갈문을 짓고 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기법은 극히 드물어 주목된다. 비신 상단의 전액은 대사간(大司諫) 윤휘정(尹彙貞)이 올렸으며 입석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일백구년(一百九年) 병진(丙辰, 1736, 영조 12) 입(立)”이다. 일부 마모가 되었지만 육안으로의 판독이 가능하다.

묘역의 좌측 아래에는 장자(長子)인 통덕랑(通德郞) 성경하(成景夏, 1673~1743)의 묘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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