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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 묘

□ 소재지 : 산북면 후리
□ 시 대 : 고려
□ 지정사항 : 경기도 기념물 제36호

서희(942~998)는 고려 성종대(成宗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이천, 자는 광윤(光允), 호는 복천(福川)이다. 조부(祖父)인 서신일(徐神逸)때까지 이천지방에 토착하던 호족이었으나, 아버지 서필에 이어서 그도 재상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중앙에 정치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아들인 서눌이 문하시중이 되고 손녀가 현종(顯宗)의 비(妃)가 되자 유력한 외척가문의 하나로도 성장하였다. 960년(광종 11) 과거급제 후 벼슬에 나가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郎)을 지내고 983년(고려 성종 2)에 군정(軍政)의 책임을 맡은 병부어사(兵官御事)가 되었다. 이후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직에 이르렀다. 993년(고려 성종 12)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거란의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외교로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후, 994년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강동육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아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시호는 장위(章威)이며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묘는 후리 양지말의 상두산(象頭山) 자락에 위치하며 바로 아래에는 아버지 서필의 묘가 있다. 묘역은 2단의 사각호석을 각각 두른 쌍분(雙墳)에 3단 계체석(階砌石)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좌측의 봉분 앞에 상석(높이 16, 폭 120, 두께 69)과 고석(높이 12, 폭 27, 두께 27)이 설치되어 있으며, 우측의 봉분 앞에도 상석(높이 15, 폭 129, 두께 69)이 배설되어 있다. 원래 각 봉분의 상석 앞으로 2기의 장명등이 있었으나, 좌측 장명등을 근래에 도난당해 지금은 우측 장명등(총 높이 약 154)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화창(火窓)을 내고 화문(花紋)을 조각한 몸체 위에 두 개의 사모지붕을 겹쳐 올렸는데, 지붕 하나는 무슨 연유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중간의 어느 시기엔가 첨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묘역의 좌우에는 문인석(높이 137, 폭 41.5, 두께 33)과 무인석(높이 150, 폭 38, 두께 25)이 1쌍식 시립해 있다. 문인석은 복두공복을 착용하고, 무인석은 장검(長劍)을 땅에 꽂고 서 있으나 박락이 심한 상태이다. 봉분의 사이에 방부원수 양식의 묘표(총 높이 137.5)가 건립되어 있다. 비신(높이 122.5, 폭 52.5, 두께 15.5)의 앞면에 큰 해서로 “송(宋)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고려(高麗) 태보태사내사령(太保太師內史令) 시장위(諡章威) 서공희지묘(徐公凞之墓)”라고 써서 피장자의 신원을 밝히고 있으나 비신의 나머지 삼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묘표의 양식이나 글씨체로 판단컨대, 아버지 서필의 묘표와 동일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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