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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치록 묘

□ 소재지 : 가남읍 안금리
□ 시 대 : 조선

민치록(1799~1858)은 철종대(哲宗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원덕(元德), 호는 서하(棲霞)이다. 숙종의 국구(國舅)인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5세손이자 이조참판 민기현(閔耆顯, 1751~1811)의 아들이며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생부(生父)이다. 1826년(순조 26) 문음(門蔭)으로 장릉참봉(章陵參奉)이 되었고 그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 등을 두루 거친 뒤 과천(果川)과 임피(臨陂)에 지방 수령으로 나가 활동하였다. 그리고 1855년(철종 6) 선혜청낭청(宣惠廳郎廳)을 맡았고, 1857년에는 영주(榮州) 군수의 일을 맡아보았다. 고종(高宗)과 명성황후가 국혼(國婚)을 올린 것은 그가 죽은 지 9년 뒤인 1866년(고종 3)의 일이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으로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순간(純簡)이다.

민치록 묘는 처음 여주 금교리(金橋里, 지금의 안금리)의 여흥민씨세장지 내에 조성되었다. 그러나 지세(地勢)가 좋지 않다 하여 제천(堤川)·이천(利川)·광주(廣州)로 계속 이장되는 고초를 겪다가 1894년(고종 31) 충청남도 보령(保寧)의 청연리(靑淵里)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2003년에 다시 초장지인 현재의 위치로 되돌아 왔으니 모두 5번을 옮긴 셈이다. 아마 이 같은 경우는 전무후무하며 조선시대 묘제 연구의 희귀한 예로 평가된다. 묘역에는 명성황후의 생부(生父)라는 신분에 걸맞게 혼유석(높이 26, 폭 82, 두께 34), 상석(높이 42.5, 폭 152.5, 두께 101.5), 고석(높이 39.5, 폭 46, 두께 46), 향로석(높이 49, 폭 38.7, 두께 33.5), 제주병석(높이 13, 폭 78, 두께 55.5), 배설석(높이 43, 폭 119, 두께 87.5), 차일석(높이 32, 폭 18.5, 두께 18.5), 망주석(높이 184, 폭 34, 두께 34), 문인석(높이 186, 폭 61.5, 두께 48), 석양(높이 67, 폭 42, 두께 120), 장명등(높이 약 223, 폭 71.5, 두께 71.5)의 모든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고종대말에 조선의 마지막 역량을 발휘해서 정성껏 만든 우수한 작품들로 조선시대 석물 조각사의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최근에 호석을 두른 봉분의 우측에는 방부개석 양식의 묘표(총 높이 약 250.5)가 세워져 있다. 오석의 비신(높이 156.5, 폭 59, 두께 27.5) 앞면에 “증영의정(贈領議政)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시순간(諡純簡) 민공치록지묘(閔公致祿之墓) 증해녕부부인(贈海寧府夫人) 오씨(吳氏) 부좌(祔左)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李氏) 부우(祔右)”라 써 놓은 글씨는, 그 우측 상단에 “예필(睿筆)”이라는 소전(小篆)이 있어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묘표음기는 의정부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1829~1904)이 짓고 사종손(四從孫) 원수부회계국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썼으며 건립연대는 “광무(光武) 오년(五年) 신축(辛丑, 1901) 시월(十月) 일립(日立)”이다. 또한 묘역 아래에는 총 높이 약 4m의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신도비가, 넓직한 2단 기단석(높이 70, 폭 427.5, 두께 428.5)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순종이 세자 시절에 지은 비문을 불초손(不肖孫)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왕명을 받들어 썼으며, 비신(높이 268.5, 폭 105 두께 46.5)의 상단에 올린 전액은 고종이 친히 어필(御筆)로 휘호하였다. 비신의 사면(四面)에 각자(刻字)하였으며 입석연대는 “개국(開國) 오백삼년(五百三年) 갑오(甲午, 1894, 고종 31) 십이월(十二月) 일립(日立)”이다. 그러나 이건(移建)하면서 방부가 훼손되어 새로 신설(新設)하였으며, 비신의 좌측 하단도 약간 파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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