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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진장 묘

□ 소재지 : 점동면 부구리
□ 시 대 : 조선
□ 지정사항 : 경기도기념물 제199호

민진장(1649~1700)은 숙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치구(稚久)이다.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민정중의 아들이자 우암 송시열의 문인(門人)이다. 할아버지 민광훈(閔光勳, 1595~1659), 아버지 민정중과 함께 삼대(三代)가 연속으로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고, 정치적으론 노론(老論)의 입장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관직은 여러 요직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는 부구리 동편 마을의 뒷산에 자리 잡고 있다. 묘역으로 오르는 길가에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신도비란 신도(神道), 즉 묘소로 오르는 길가(墓道)에 세우던 비석으로, 그 비문은 망자(亡者)의 생애를 기록한 서(序)와 그 생애를 찬미(讚美)하고 시(詩)로 읊은 명(銘)으로 구성된다. 중국 한대(漢代)부터 건립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세워졌다. 현재 남아 전하는 모든 신도비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들이다. 고려시대에도 소수 입석되었다고 기록으로 전하나 실물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파악할 수 없다. 신도비의 건립에는 막대한 인력과 물량이 소요되는 만큼, 아무나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후에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의 품계에 추증(追贈)된 자만이 세울 수 있었다.

총 높이 약 426㎝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민진장 신도비는 보는 이를 압도하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비석 받침인 방부(높이 111, 폭 176, 두께 121)는 화강암을 사각형으로 다듬어 사용하였는데, 앞면에는 연못에 가득 핀 백련꽃 사이로 노니는 현무(玄武)를 조각하고 좌우에는 사자를 배치하고 이어서 뒷면에는 화문(花紋)을 가득 장식하였다. 또한 비신(높이 235, 폭 105.5, 두께 38.5)을 보호하고 있는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屋蓋石, 높이 약 80, 폭 169.5, 두께 98.5) 용마루에는 여의주를 입에 문 쌍룡(雙龍)이 똬리를 틀고 앉아 눈을 부릅뜬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조각 수법이 사실적이고 양식이 매우 뛰어나 영조대를 대표할 만한 신도비로 판단되며, 특히 비석 받침에 조각된 문양들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어, 조선시대 석조미술사의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비문은 대학자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가 짓고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명필인 우산(盂山) 홍봉조(洪鳳祚, 1680~1760)가 썼으며 종제(從弟)되는 민진원이 전액을 올렸다. 전액이란 비신의 제일 윗부분에다 누구의 신도비라고 제목만 큰 전서(篆書)로 간략히 쓴 것을 말한다. 전액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증시문충(贈諡文孝) 민공신도비명(閔公神道碑銘)”이라 되어 있어 민진장신도비임을 알 수 있으며,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백십육년(百十六年) 계해(癸亥, 1743, 영조 19) 오월(五月) 일(日)”이다.

신도비 뒤로 조금만 오르면 양지 바른 곳에 자리 잡은 민진장 묘소가 나타난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5, 폭 93, 두께 46), 상석(높이 47, 폭 160, 두께 97), 고석(높이 24, 폭 40, 두께 40), 향로석(높이 50, 폭 40, 두께 35), 망주석(높이 203, 폭 37, 두께 37), 문인석(높이 198, 폭 60, 두께 54)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고, 팔각의 호석(護石)을 두른 봉분 좌측에는 묘표(총 높이 221)가 세워져 있다. 음기의 지은이는 마모되어 파악할 수 없지만, 금원군(錦原君) 박사익(朴師益, 1675~1736)이 써서 1734년(영조 10)에 세운 것이다. 또한 왕실의 지친(至親)이 아니면 마련할 수 없는 호석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민진장 일문(一門)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석물 또한 당대의 명장(名匠)들이 참여한 듯, 조각 솜씨가 뛰어나다. 호석을 제외하곤, 숙종대 사대부 묘제의 전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묘제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민진장 묘의 좌측 구릉에는 호조정랑(戶曹正郞) 민재수(閔在洙, 1668~1718), 돈령부판관(敦寧府判官) 민계수(閔啓洙, 1671~1720)의 묘소도 위치하고 있어 이 일대가 여흥 민씨의 세장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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