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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묘

□ 소재지 : 대신면 옥촌리
□ 시 대 : 일제강점기

민병석(1858~1940)은 고종대(高宗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 또는 의재(毅齋)이다.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1664~1736)의 후손으로 좌찬성(左贊成) 민영위(閔泳緯, 1818~1886)의 손자이고 증판돈령원사(贈判敦寧院事) 민경식(閔敬植, 1841~1864)의 아들이다. 1880년(고종 17)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아가 1883년 승지에 제수되었다. 갑신정변(1884)이후 도승지로서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1889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직시에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여 조병세(趙秉世, 1827~1905)의 탄핵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중 흥선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군(淸軍)과 긴밀히 연락, 일본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원주(原州)로 유배되었다. 1895년 사면된 뒤 군부대신·학부대신·궁내부대신 등의 요직을 지냈다. 또한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직조단포주식회사(織造緞布株式會社)·농업회사 등의 조직과 경영에 참여하고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자작(子爵)이 되고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글씨에 능해 당대 명필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해서와 행서에 뛰어났다.

묘는 옥촌리 벌말의 북쪽 구릉에 남서향(南西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 5, 폭 76, 두께 매몰), 상석(높이 35, 폭 113.5, 두께 78), 고석(높이 30, 폭 41.5, 두께 41.5), 향로석(높이 39.5, 폭 37, 두께 28.5), 망주석(높이 166, 폭 36, 두께 35.5) 석양(높이 65, 폭 42.5, 두께 117.5)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고, 문인석은 최근에 추설하였다. 원형 고리가 달린 고석과 향로석의 뒷면을 돌출시켜 상석을 받쳤다. 석양은 신체에 비해 다리가 짧고 굵은 것이 특징이고, 망주석에는 문양을 일체 장식하지 않았다. 석물의 종류가 다양하고 상태도 양호하여 일제강점기 석물의 기준작으로 삼을 만하다. 봉분의 우측에 1998년에 건립한 방부이수 양식의 묘갈이 건립되어 있다. 오석의 비신 앞면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 여흥(驪興) 민공(閔公) 휘병석지묘(諱丙奭之墓) 간좌(艮坐) 배(配)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순천박씨(順天朴氏)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송심씨(靑松沈氏) 부좌(祔左)”라 되어 있어 삼위합폄(三位合)임을 알 수 있다. 나머지 삼면(三面)에 족제(族弟) 민병관(閔丙寬)이 지은 묘갈문을 철성(鐵城) 이석환(李錫煥)이 썼으며 갈제(碣題)는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 여흥(驪興) 민공병석(閔公丙奭) 묘갈명(墓碣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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