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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규 묘

□ 소재지 : 점동면 덕평리
□ 시 대 : 조선

권규(1393~1421)는 조선 세종대(世宗代)의 인물로 본관은 안동, 자는 평윤(平允)이다. 대학자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의 아들로 태종의 제3왕녀 경안궁주(慶安宮主)와 혼인하여 길창위(吉昌尉)에 봉해졌다가 후에 길창군(吉昌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시호는 제간(齊簡)이다.

묘는 덕평리 능안골의 북쪽 구릉에 남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묘역은 길이 약 40m, 폭 약 14m의 규모로 조성되었으며 총 5단의 계체석(階砌石)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묘역을 오르기 쉽게 각각의 계체석 앞에 1개 또는 3개의 장방형(長方形) 디딤돌을 놓았으며, 묘역의 뒤쪽에는 5단의 축대를 쌓아 토사(土砂)의 유입을 방지하였다. 봉분은 전후분(前後墳)의 형태로 조성하였는데, 각각의 봉분에는 팔각형의 호석(護石)이 1단으로 설치되어 있다. 후분(後墳)에는 권규가 매장되었으며, 봉분 앞에 방부하엽 양식의 묘표(총 높이 178)가 세워져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높이 108, 폭 50, 두께 25)의 앞면 중앙에는 한 줄의 해서체 글씨로 “조선국(朝鮮國) 부마(駙馬) 길창군(吉昌君) 증시(贈諡) 제간(齊簡) 권공지묘(權公之墓)”라 되어 있다. 비신의 뒷면에는 “황명(皇明) 정통(正統) 칠년(七年) 임술(壬戌, 1442, 세종 24) 이월(二月) 이십구일(二十九日) 천장(遷葬) 우여흥부남촌(于呂興府南村) 덕곡리강금산(德谷里剛金山)”이라는 글을 새겼을 뿐, 별도의 음기(陰記)를 기록하지 않았다. 묘표 앞에는 상석과 고석이 놓여 있다.

경안궁주(慶安宮主)를 모신 전분(前墳)의 앞에도 방부하엽 양식의 묘표(총 높이 170)가 건립되어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신(높이 107, 폭 50, 두께 24)의 앞면 중앙에는 한 줄의 해서체 글씨로 “조선국(朝鮮國) 태종(太宗) 제삼녀(第三女) 경안궁주(慶安宮主) 이씨지묘(李氏之墓)”라 되어 있다. 비신의 뒷면에는 권규 묘표의 뒷면과 동일한 기사를 각자(刻字)해 놓았다. 묘표 앞에는 후분과 동일하게 상석과 고석이 자리 잡고 있다. 전분 앞의 묘정(墓庭)에는 문인석 2쌍이 시립해 있다. 키가 약 2m에 이르는 육중한 문인석은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관복메(官服)을 입고 있는데, 홀(忽)을 쥐고 있는 손은 옷소매에 가려져 있으며, 얼굴에는 두 가닥의 굵직한 수염이 나 있다. 바깥쪽(높이 237, 폭 70, 두께 52)과 안쪽(높이 225, 폭 62, 두께 50)의 문인석 모두 규모와 양식이 거의 동일하다. 묘역의 중앙에 놓여 있는 장명등은 근래 도난당하여 다시 옛 양식 그대로 복원해놓은 것이다.

묘역이 조성된 구릉 아래에는 신도비의 구조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방형(長方形)의 비석받침〔方趺〕과 비신(碑身)의 위에 얹었던 하엽(荷葉) 모양의 석재(石材)가 방치되어 있다. 비석받침에는 15세기 중반의 유행대로 복련(覆蓮)과 안상(眼象)이 단정하게 장식되어 있다. 주변에서 비신이나 비편(碑片)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당초 신도비를 세우려고 위 석재들을 준비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건립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권규와 경안궁주 부부의 묘는 왕릉(王陵)에 버금가는 규모로 조성된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왕실 관련 묘소로, 지금까지 알려진 여타 지역의 부마 묘소보다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그에 부속된 석물과 구조물은 장명등만 근래에 도난당해서 새로 설치했을 뿐, 조성 초기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그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높다고 판단된다.

묘의 좌측에는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권담(權聃)과 호분위호군(虎賁衛護軍) 권은(權訔)의 묘소가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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