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문화유산 회화 및 고문서... 회화 남악 윤승길 영정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남악 윤승길 영정

□ 소재지 : 점동면 사곡리

윤승길(尹承吉, 1540~1616)은 광해군대(光海君代)의 문신으로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일(子一), 호는 남악(南岳)이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의 후손이자 이조참판 윤은필(尹殷弼)의 손자이며 사헌부감찰 윤홍언(尹弘彦)의 아들이다. 1561년(명종 1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 19)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구성부사(龜城府使)에 재직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군량미 조달과 병력 조달 등에 공을 세웠다. 다음 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전란에 시달려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고 장정을 선발하여 기효신법(紀効新法)을 훈련시켜 명(明)의 지휘관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1600년(선조 33)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때 딸이 선조(宣祖)의 제7왕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과 결혼하였다. 이후 한성부우윤을 거쳐 의정부좌참찬에 이르렀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臨海君)의 역모 사건을 잘 처리하여 익사공신(翼社功臣)에 책록(策錄)되고 해선군(海善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윤승길 영정은 관복(官服)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 형태의 전형적인 공신(功臣) 도상(圖像)이다. 공신 초상화는 왕명에 의해서 당시의 이름난 화가(畵家)들이 그리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므로, 윤승길 초상화도 왕명에 의해 당시 이름난 화가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또 공신 초상화는 공신과 그 자손을 치하하고 다른 신민(臣民)들에게는 귀감(龜鑑)이 되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윤승길 영정은 임해군 역모 사건을 처리한 직후인 1613년(광해군 5)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상태도 매우 양호하여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양손은 공수(拱手) 자세를 취하고 두 발은 족좌대(足座臺)에 올려놓았으며 그 아래에는 화려한 문양과 색깔로 정교하게 꾸민 오색채전을 깔아 놓았다. 가슴에는 모란꽃과 운문(雲紋) 사이로 노니는 모습의 공작 1쌍을 수놓은 흉배(胸背)를 착용하고 허리에는 서대(犀帶)를 차고 있다. 얼굴의 표현이 극히 섬세한데 특히 눈동자와 수염이 아주 사실적이다. 익사공신은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임해군이 무고(誣告) 당한 것으로 밝혀져 모두 삭훈(削勳)되었다. 그러므로 익사공신들의 초상화와 교서(敎書)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윤승길 영정은 익사공신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 전하는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후손에 의하면 광해군대에 그려진 것으로 원래 기로사(耆老社)에 걸려 있던 것을 하사받은 것이라 한다. 그 후 점동면 사곡리의 해평 윤씨 종택(宗宅)에서 계속 보관해 왔으며 6·25전쟁 때 잠시 부천(富川)으로 이안(移安)했다가 근래에 다시 종택으로 모셔 왔다고 한다. 그리고 1994년 인사동에서 표구를 새로 하면서 훼손된 부분과 색깔이 바랜 곳을 일부 수리했다고 한다.

매년 음력 10월 1일 시제(時祭)를 지낼 때 밖으로 모셔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며, 규모는 가로 104.5㎝이고 세로 181.5㎝이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