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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루터

□ 소재지 : 여주시 창동 여주초등학교 교정
□ 시 대 : 고려

청심루는 창동에 있는 여주초등학교 건물 바로 뒤편에 있었던 누정으로, 여주 관아의 객사 북쪽에 있는 부속 건물이었다. 해방 전까지도 관상목(觀賞木)이 많이 있어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하나 1945년 8월 22일 군수 관사의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그 터에 1987년 12월 26일 경기도에서 “청심루터” 표석을 세웠다.

여주는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부터 강변을 따라 여러 곳에 누정이 세워졌다. 그중에서 여주 관아의 객사였던 청심루가 가장 유명했다. 청심루에서 바라보는 신륵사의 동대(東臺, 다층전탑)가 아득히 보이고 서쪽으로 영릉의 울창한 송림과 강 아래로 오고가는 돛단배들이 그림처럼 전개되는 등 ‘여주팔경(驪州八景)’의 경관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유람을 하며 글을 남겼는데, 한때 목은 이색(1328~1396), 포은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한 약 40여 명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청심루는 1617년(광해군 9) 여주군수 김용(金涌)이 중건하였다. 또한 숙종대왕 어제(御製)의 “독동국사(讀東國史) 감고려우정언이존오충절(感高麗右正言李存吾忠節) 수작찬(遂作贊)”이 걸려 있었다. 이는 우암 송시열이 1682년(숙종 8) 여주로 내려와 머물 때 청심루에 올라 효종의 녕릉(寧陵)을 바라보고 그리며 여러 편의 시를 지었던 인연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우암 송시열은 “청심루(淸心樓)”라고 현판을 새로 쓰고 걸어 놓았다.

여주에 능행하였던, 정조가 청심루에 나아가 관찰사 정창성(鄭昌聖)에게 명하여 크고 작은 모든 배를 정돈하여 대령하게 하고, 주변 언덕 위로는 각 영의 대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치게 한 뒤, 배 수백 척을 청심루 앞에 정돈하여 횃불을 올림과 동시에 각 영과 배에서 일제히 응하여 고악(鼓樂)을 울리게 하였는데, 이때 강을 둘러 구경하던 여주의 남녀노소가 만 명에 이를 만큼 장관이었다고 한다.

청심루에는 조두순(趙斗淳)이 1856년(철종 7) 여름에 쓴 「청심루기(淸心樓記)」가 있었다. 또한 1869년(고종 6) 여주 부사 이인응(李寅應)이 여주 관아에 대한 대대적인 중건을 시작하면서 퇴락한 청심루도 1870년 3월부터 수선하기 시작하여 8월에 마쳤다. 중수를 마친 뒤 이인응은 「청심루중수기(淸心樓重修記)」를 써서 청심루에 걸었다.

여주의 청심루는 서울의 낙천정과 세검정, 광주의 청풍루, 파주의 화석정, 청풍의 한벽루, 남원의 광한루, 제주의 관덕정과 더불어 유명한 정자 가운데 하나로 시인묵객들이 남한강을 지나다가 반드시 들러보는 명소였다. 청심루에 올라 제영을 지은 시인묵객들은 이곡, 이색, 김구용, 정추, 정자후, 설문우, 도원흥, 김종직, 최숙정, 서거정, 한수, 김안국, 이황, 유성룡, 노수신, 송시열, 홍섬, 홍양호, 신광한, 권상하, 이병연, 이항로, 김좌근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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