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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응린 일가 충효열정려문

□ 소재지 : 흥천면 신근리
□ 시 대 : 조선

신근리 방죽안 마을 초입에 세워져 있는 충효열정려문이다. 팔작지붕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그 내부에 정려비를 모셔 놓았다. 단청을 칠한 지붕의 처마 밑에는 “충효열정문(忠孝烈旌門)”의 현판을 걸었으며 건물 주위로 시멘트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대문 입구에는 계단을 설치하고, 그 좌측에 정려문의 연혁을 담은 표석을 세워 놓았다.

정국공신(靖國功臣) 정응린(1531~1592)은 1591년(선조 24)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다. 가족도 모두 동행, 지평(砥平)의 고라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인해 정응린을 비롯해 큰며느리 청풍 김씨와 셋째 아들 정괄(鄭适), 넷째 아들 정일(鄭逸)이 전부 순절하였다. 큰 아들 정적(鄭迪)은 군량 조달 중에 비보를 듣고 싸움터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후 정적(鄭迪)은 왜군의 섬멸에 적극 노력하였고 전쟁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분당(安分堂)이라 자호(自號)하며 지냈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바로 어가(御駕) 호위를 위해 달려갔으며, 그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 이 같은 행적을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1725년(영조 1) 양대삼위(兩代三位)에 충효열(忠孝烈)의 정려문을 하사하였으니 충신은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정응린이고 충효는 증형조판서(贈刑曹判書) 정적(鄭迪)이며 효열은 정부인 청풍 김씨이다. 이후 병화로 인해 퇴락하고 소실되었는데, 1974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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