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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금사나루

□ 소재지 : 금사면 외평리 482 일대
□ 시 대 : 조선

금사면 금사리 밭들·금새마을과 남한강 건너편의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윗자진개를 연결하던 나루이다. 본래 명칭은 상자포나루 또는 윗자진개나루였지만, 현재 개군면은 양평군 소속이므로 ‘금사나루’로 바꾸어 소개하기로 한다. 상자포리는 대신면 천서리에서 양평 방향으로 3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곡수리로 가는 4번 지방도로가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여기에서 방앗간 표시를 따라 좌측 길로 들어서 내려가다가, 길이 다시 37번 국도를 향해 돌아 나오는 지점에 강변을 향해 내려가면 나루터에 다다르게 된다.

금사리는 금사교를 중심으로 개울 북서편의 금새(금계동, 벌말)와 개울 남동편의 밭들로 나뉘는데, 상자포나루의 나룻배는 손님이 원하는 바에 따라 금새 쪽 강기슭에 대기도 하고 밭들 쪽의 강기슭에 대기도 하였다고 한다. 금사나루의 마지막 사공은 상자포리에 살던 김종남씨였는데 작고한 것은 15년이 넘었으며, 그가 작고하기 5년쯤 전부터 뱃사공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자포나루가 소멸한 것은 1985년 이전의 일이 된다. 다른 한편 상자포나루가 없어진 까닭은 이포대교(공사기간 : 1987. 11~1991. 12)가 준공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금사리와 상자포리의 주민들은 상자포나루를 이용하기 위해 봄에 보리 한 말, 가을에 벼 한 말씩을 내다가 그 후 가을에 쌀 한 말씩을 내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보다 나중에는 마을사람이거나 타지 사람이거나를 막론하고 돈을 내고 건너다녔다고 한다. 상자포나루에서는 나룻배를 이용하기 위해 곡식을 내는 것을 ‘나루추렴’이라고 하였는데, 나루추렴이 보리/벼 연 2회에서 쌀 연 1회로 바뀌게 된 것은 2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도 마을의 젊은 사람들은 1년에 몇 일간 뱃사공집의 일을 해주고 나룻배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 일수는 그 때마다 곡식으로 환산한 품값의 기준을 따랐다. 나룻배가 없어지기 직전에 한 번 건널 때마다의 뱃삯은 200~300원 정도였다. 상자포나루의 나루추렴을 걷는 범위는 양평군 개군면에서는 상자포리, 하자포리, 자연리, 부리, 내리 일대였으며, 여주군 금사면에서는 금사리, 외평리, 소유리, 하호리 그리고 상호리 일부였다.

추렴 시에는 각기 개군면 추읍산 밑의 내동과 금사면 대렴봉 밑의 윗범실부터 차례로 내려오면서 나루추렴을 걷었다. 상자포나루를 왕래하는 규모는 바로 하류의 하자포나루와 비슷했다고 한다. 상자포나루로 내려가는 끝 집에 마지막 사공인 김종남씨의 부인 김연희씨가 그대로 살고 있다. 그런데 김연희씨는 남편이 나룻배를 몰지 못할 때는 직접 나룻배를 몰기도 하였다고 하므로 그 자신이 마지막 뱃사공이기도 하다.

나루추렴은 사공이 직접 마을로 걷으러 다녔는데 김연희씨는 ‘한 번 건너도 잘 주는 사람이 있고 몇 번밖에 안 건넜다고 안주는 사람도 있다’고 회상한다. 그에 따르면 집에 학생이 너무 많다고 해서 나루추렴을 의무적으로 더 내야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사람마다 생각해서 한 말 정도씩 더 내는 경우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김연희씨에 따르면 김종남씨의 집안은 부친인 김춘배씨를 비롯하여 조부인 김윤한씨 등 3대를 이어서 상자포나루의 뱃사공을 했다고 한다. 원래 상자포나루의 뱃사공 김씨댁은 현재의 위치 아래 터에 있었는데, 1972년 대홍수 때 잠겨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원래의 뱃사공 집터는 빈터로 남아 있다.

뱃사공 일은 사람들이 건너달라고 하면 밤중이나 식사 중이거나 할 것 없이 아무 때나 뛰어나가야 하는 일이므로 고달픈 일이었다. 배를 부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흐르는 물을 고려하여 멀리 대각선으로 삿대를 놓아야 하는데, 서툴면 삿대가 배 밑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꺼내려다가 사람까지 따라 떨어지는 일도 있었으며, 삿대질을 하다가 삿대를 떠내려 보내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상자포리 사람들이 이포장을 이용할 때는 상자포나루를 이용하지 않고 이포나루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포나루에 대해서는 나루추렴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건널 때마다 배삯을 내고 건넜다고 한다. 이포나루는 번성하여 돈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지기 직전 경매 입찰을 할 때에는 1~2억 원을 호가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개군면 사람들이 상자포나루를 많이 이용하였던 것은 나무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주시 금사면의 윗범실과 소유리의 소리실은 개군면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많이 다니던 곳이었다. 반대로 금사리 쪽에서 상자포리로 나루를 건너는 사람은 곡수장을 가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상자포나루의 나룻배는 목조선이었다가 25~30년 전에 철선으로 바뀌었다. 목조선은 정원이 20명 정도로 나뭇짐을 하는 사람의 왕래가 잦았을 당시에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철선은 정원이 50명쯤 되는 큰 배를 군에서 마련해주면서 목조선을 대체하게 되었는데, 과도기에는 큰 배와 작은 배 2척으로 나루를 운영하였다.

큰 배는 혼자 몰 수 없었지만, 보통 사람이 많이 타면 배를 몰 줄 아는 마을사람이 한두 사람씩은 있기 때문에 같이 배를 부렸다고 한다. 군에서 마련해준 철선은 큰물에 떠내려가서 양평중학교 뒤에 박혀 있는 것을 찾아왔는데, 배가 부서져 있어서 정원이 8명 쯤 되는 작은 철선을 새로 구입하게 되었다. 배는 이포에 가서 당시 20만 원을 주고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 철선 역시 삿대와 노로 움직이는 배였다.

사공 김연희씨 집에서는 정월 대보름 새벽에 ‘어부심’이라고 고사를 올린다. 어부심고사 시에는 식구 수대로 밥 세 숟가락씩을 바가지에 떠가지고 가서 강물에 흘려보낸다. 이때 바가지는 엎지 않고 강에 담가 물이 들어가게 하여 살랑살랑 흔들어서 흘러내려가게 해야 한다. 김연희씨의 시어머니가 살아 있던 시절에는 어부심고사를 올릴 때 먼저 용왕소지를 올리고, 이어서 아이들 소지를 차례로 올렸다고 한다.

어부심에 쓰는 바가지는 보통 때 쓰는 바가지가 아니라 어부심 때만 쓰기 위해 따로 보관해놓는다. 또한 어부심에 쓰는 바가지는 화장실 지붕에 올린 박은 쓰지 않고 될 수 있는 대로 행랑지붕처럼 깨끗한 곳에 올린 박을 사용해서 만든다고 한다. 칠석날에는 ‘부치미’ 두 접시를 부쳐서 막걸리와 함께 나루터의 배와 뭍 2곳에 놓고 고사를 올린다.

또한 10월 상달 저녁에 시루고사를 올릴 때에는 안당고사, 성주고사, 걸립고사, 터주고사를 마친 후 강가로 나가 용왕고사를 올린다. 과거 나룻배를 보던 시절에는 시루팥떡으로 ‘용왕시루’를 해서 먼저 배에다 놓고 절을 하고 이어서 뭍에다 놓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이미 뱃사공 일을 그만둔 상태이므로, 2001년의 용왕고사에서는 강가에만 떡시루를 올리고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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