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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이포나루

□ 소재지 : 금사면 이포리 380 일대
□ 시 대 : 삼국

금사면 이포리와 남한강 건너편의 대신면 천서리를 연결하던 나루로 여주지역에서는 가장 늦게까지 활용되었던 나루이다. 여주나루의 유래는 본래 이곳에 관(官)에서 운영하는 나루인 ‘진강도(鎭江渡)’가 설치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조선 초기의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폐현(廢縣)인 천령현(川寧縣)에 관에서 설치한 나루인 ‘진강도’가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 지역의 지명인 ‘이포(梨浦)’라는 명칭도 이 나루에서 유래한 것으로 ‘배개’, 곧 ‘배가 닿는 터’의 한자어식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천양나루’라는 명칭은 본래 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천령현’의 음이 약화된 현상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포지역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다. 일찍이 고대 삼국시대부터 백제와 말갈 또는 신라와 고구려, 말갈의 군사적 접경을 이룬 곳이었는데, 이러한 사정은 이포지역이 중부지역의 자연조건상 서울의 북한산과 충주 문경새재의 중간 부분에 위치한 수로상의 요충지인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 까닭에 현재에도 이포 지역은 인근의 여주·이천·양평으로 이어지는 교통상의 요충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본래 이포 지역에 천령현이라는 하나의 군현이 설치된 것이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포지역의 이러한 특성은 읍치(邑治)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에는 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과 명유석사(名儒碩士)가 이곳에 은둔하면서 권토중래를 꿈꾸기도 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이포지역, 즉 천양 일대는 인구가 1,000여 명을 넘었고, 이포나루는 여주 동쪽의 양평 지제 및 원주 지역 주민들을 이천 시장 및 서울 시장과 연결시켜 주는 주요 통로였다. 6·25전쟁 이후부터는 대형 조선으로 차량까지 운송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7년 11월부터 1991년 12월 사이에 이포대교의 건설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 기능이 대체됨으로써 나루는 소멸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한국수산지』에 따르면 여전히 성행하던 이포나루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 있다. 즉, “이포는 여주군 대송면에 속하며, 여주읍의 하류 2리쯤, 강의 남안에 있다. 강안은 직선으로 계선(繫船)에 편리한 것은 아니다. 원래는 자못 번영한 동리였으나, 전 년(1910년)의 폭도들로 인해 70호가 소실되고 지금은 100여 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농업 지역이지만 상인도 적지 않은데, 대개 선승업자이다. 재목을 매입하기 위해 내지(일본인) 상인도 때때로 오며, 일찍이 5명이 정주한 바 있다. 선승을 업으로 하는 자가 있으나 낚시는 행해지지 않으며, 이곳의 물흐름은 폭이 1정 반, 수심이 1심 내지 3심으로 물살이 완만하다”고 하였다. 또 『치수급수리답사서(治水及水利踏査書)』에 의하면 “이포는 복하천 합류점의 하류 약 20정에 위치한 여주군 금사면 좌안에 있으며, 호수는 266호(이중 내지인 6호), 인구 1,339인(내지인 16인)에 이른다. 어느 정도 시가를 형성하였고 오지에는 광활한 평야지대가 있으며, 이천 시장과의 거래가 있어 물자의 집산량이 많다. 이입품으로 주요한 것은 일개 년의 식염 약 700석, 건어 150태, 석유 약 30상이며, 이출품으로 주요한 것은 백미 약 1,000석, 벼 약 3,000석, 대맥 약 500석, 대두 약 100석 등이다. 나루는 수심이 깊어 비교적 양호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포 주민들 가운데 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경우 배의 규모가 작고 2~3명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포장은 출장자가 많았으며, 일제강점기때는 인근 지역에 금광이 두 군데나 있어서 ‘금쟁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금광 인부들만 200명이나 되어 시장터에 주막과 술집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이포의 배후지는 이천이었으며, 여주 및 양평까지 마차와 달구지를 이용하여 화물을 운반하였다. 그러나 300여 호에 이르던 호수가 이제는 150호로 줄었다. 부근에 수부(水夫)마을이 있었는데, 현재는 수굿마을로 동명이 바뀌었다. 경상도, 충청도 및 부근 광주의 소가 모였던 이천은 우시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이천 우시장에는 중매인이 30명이나 될 정도였다. 중매인의 우두머리를 ‘쇠대행수’라고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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