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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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양화나루

□ 소재지 : 능서면 양화동 내양리 350 일대
□ 시 대 : 조선

능서면 내양리 양화동과 남한강 건너편의 대신면 초현리를 연결하던 나루로, 마을 명칭에 따라 내양나루라고도 하였다. 양화나루는 능서면과 대신면을 연결하는 나루로 양화동 주민들은 여주장을 많이 보았지만, 이천장이나 곡수장에 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양화동으로부터 여주까지는 20리 길, 이천까지는 30리 길이 되는데, 곡수장에 가기 위해서는 나루를 이용하여 남한강 건너편의 대신면 초현리 건너멀띠를 거치게 된다.

양화동이나 건너멀띠에는 모두 6·25전쟁 전까지 40~50호가 살았다. 양화동 쪽에서 건너멀띠로 나루를 건너는 사람은 곡수장에 가려는 사람들인데, 곡수장을 보려는 까닭은 주로 우시장에서 소를 팔기 위해서였다. 그 규모가 작지 않아서 당시 여주 능서면 일부와 흥천면, 그리고 이천시 백사면과 부발읍에서 양화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여주의 마지막 나루였던 이포나루와 비슷했다고 한다.

양화나루에는 나룻배가 세 척 있었는데 일반 보행하는 사람을 태우는 나룻배가 두 척, 소를 열 마리씩 싣는 배가 한 척 있었다고 한다. 나룻배는 마을 소유였으며 뱃사공은 여럿이 동네에 일정 금액을 맡기고 돌아가면서 일을 했다. 매년 강이 얼면 배는 강가에 대놓고 배목수를 불러서 배를 수리하게 된다. 배목수는 왕대리에 살았으며, 수리비는 마을 기금에서 냈다고 했다.

양화동에는 서울에 사는 큰 지주가 세 명 있었는데, 왕족인 이만선과 이관, 그리고 해평 윤씨 윤광선씨가 그들이었다. 윤광선씨에 대해서는 양화동의 마을 입구에 작인들에 의해 60년쯤 전에 영세불망비가 세워졌다. 이들은 모두 보통 한 해에 3,000~4,000가마씩 도지를 해가는 대지주였으며, 적어도 2,000가마씩은 양화나루를 통해 서울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양화동 외에 인근의 다른 지역에도 많은 소작을 주고 있었으며, 소작료로 걷은 곡식은 배로 옮겼는데 미처 실어내지 못하면 봄에 실어갈 정도로 추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지주들은 추수 때가 되면 양화동으로 내려와 마름집에 앉아서 추수를 받았다고 한다. 그 외에 ‘적산임야’ 106정보가 있어서 이 산판으로부터 나온 나무를 실어내기 위해 강배들이 많이 드나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배들은 모두 타지에서 나무를 싣기 위해서 들어오는 배이며, 산판은 목상이 직접 와서 베어갔다.

나루보다 하류 쪽으로 내려간 곳에 ‘서낭당 말림’이 있어서 3년에 한 번씩 당굿을 하였다. 당굿은 음력 정월 중에 날을 받아서 벌였는데, 당굿을 하면 광대들이 줄을 타고 무당과 화랭이들이 굿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노는 굿을 ‘고창’ 이라고 불렀다. 화랭이패는 ‘무당을 따라 다니면서 장구를 치고 깡깡이를 틀고 장구, 북, 징을 치고 하는 사람들’로 무당이 이들을 지휘하여 굿을 진행하였다.

양화동의 당굿과 이포의 굿은 같은 해에 벌이는데 고창을 하는 무당, 화랭이패, 광대들은 양쪽의 규모가 같았다고 한다. 서낭당 말림에는 당집이 있고, 그 뒤로 엄나무 큰 것들이 여러 그루 서 있었는데, 당집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부셔져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진 양화동 서낭당에는 부처님 그림 세 폭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중 가운데 있는 것이 말을 타고 있는 ‘마태장군님’이며, 그 한쪽 옆이 동자가 앞에 서 있는 ‘동자부처님’이고, 다른 한쪽은 강과 관련된 부처님이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이름은 미상이다.

양화동에서 서낭당굿을 마지막으로 한 것이 이미 오래 전이므로 당굿 절차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바가 없다고 한다. 당굿 날짜가 정해지면 장승이 서 있는 마을 입구와 나루터에 금줄을 매는데, 이는 출입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사람이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순서는 먼저 당굿을 하고, 이어서 마을 입구에 가서 장승굿을 하며, 마지막으로 선창에 와서 용왕굿을 하였다고 한다. 제물은 소를 쓰다가, 60~70여 년 전부터 하얀 털이 섞이지 않은 검은 돼지를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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