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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여주나루

□ 소재지 : 여주시 홍문동 4 일대
□ 시 대 : 고려

여주시청사 뒤편에서 남한강 건너편의 학동을 연결하던 나루이다. 현재 여주시청 뒤편에 표석이 세워져 있어서 그 현장을 가늠해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의 문헌기록에는 ‘관진(官津)’으로 분류되어 관헌이 상주했던 나루였다. 즉,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여주읍내로 통하는 수로상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여주지역에 설치되었던 포구로 ‘황려포(黃驢浦)’가 나오는데, 여주나루가 조선시대 관진이었다는 점에서 그 전신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만하다고 생각된다.

여주는 남한강 중류지역에서 가장 큰 도회지의 하나로 인구는 2,000명이 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수려선 철도가 개통되어 일대의 물자들이 이곳으로 모여 기차화물로 수원과 인천, 서울 등지로 퍼져나갔다. 서울로 내려가는 수로는 물이 풍부하면 마포까지 2일 일정이며, 오래 걸릴 경우 4~5일이 소요되었다. 마포에서 소강하여 올 때는 바람을 받으면 4~5일, 바람이 없으면 6~7일이 걸렸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에 따르면 “여주읍은 경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8리 지점에 강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강원도의 원주읍까지 9리, 서로는 이천읍까지 4리, 또 양지·용인 등을 경유하여 수원까지는 15리 정도면 이르는데 모두 우편선로가 된다. 이쪽에서는 한강을 여강(驪江)이라고 부르며 강기슭은 둥글게 굽어 있어 계선(繫船)이 편리하다. 호수는 785호, 인구는 3,130여 명으로 일본인은 상인 거주자도 적지 않고 농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다. 이곳은 여주군의 치소로 군아(郡衙) 외에 경찰서·헌병분견소·수비대·우편소 등이 있으며, 매 음력 5·10일에 장시를 개설한다. 집산물은 소, 미곡, 목탄, 연초, 면, 목면, 금건(金巾), 양목, 어류, 과일, 잡화 등으로 매 개시일당 집산고가 1,000여원을 상회한다. 연중 한강에 의해 이입되는 주요 수산물은 명태 100태, 조기 40~50옹, 새우젓 100옹 정도이며, 값은 일정하지 않지만 대개 명태 1태 25원, 조기 1옹 14원 내외, 새우젓 1옹 6~7원이 된다고 한다. 어업자는 6호, 종업자 10여명인데, 모두 농민이다. 어선은 6척으로 주낙(延繩)이 25, 잉어그물로는 30장을 보유하고 있으며, 어획물은 잉어·뱀장어·메기·붕어·누치 등으로 하루 어획고는 25관목 내지 60관목이라고 한다. 이 강변에서 한강의 폭은 1정 반 정도이며, 수심은 3척에서 24척으로 물흐름은 느리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주나루는 한강 중류에 위치한 수상 및 육상 교통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배후지에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물자의 출입이 많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1년 간 이곳으로 들어온 화물 중에는 식염 약 1,200석, 건어 약 400태, 석유 약 80상, 기타 잡화 등이 있었으며, 이곳으로부터는 백미 약 5,000석, 벼 약 3,000석, 대두 약 300석, 소맥, 대맥 소두 등이 퍼져나갔다. 여주나루는 수심이 상당히 깊고 물살이 완만하여 기항은 편리하지만, 하안 경사도가 급하여 하역은 불편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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