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문화유산 관방·교통유적 교통유적 역원터유적 양화역터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양화역터

□ 소재지 : 흥천면 귀백리 역말 일대
□ 시 대 : 고려

조선시대 여주지역에 소재하였던 3개 역의 하나로 현재의 능서면 내양리 안말마을이 그 유지에 해당한다. 여주읍에서 이포지역으로 연결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역으로 특히 능서지역에서 집결된 세곡의 운송과 관계되었던 역으로 이해된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이미 고려시대부터 평구도(平丘道) 소속의 역참으로 양화역(楊化驛)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양화역은 천령군(川寧郡) 소속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여주읍에 해당하는 황려현의 경계를 추정하는 데에도 일정한 시사점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그 관할이었을 양화나루는 일제강점기 수려선(水驪線)이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여주·이천지역에서 생산되는 미곡의 집산지 및 반출지로 번창하기도 하였다.

이 역은 비단 육로뿐 아니라 한강을 이용하여 상경하는 수로로서의 큰 역할을 했고, 특히 양화창(楊花倉)이라 하여 커다란 정부용 보관 창고가 있어 충청도 북부지방의 조세량과 강원도 일부, 경기 동남부 전체의 물량을 이곳에 집결 적재하였다가 정부가 필요로 할 때 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수송하여야 했다. 이에 따라 조선 세종 때는 크게 확충하여 반군(般軍)이 127명이나 되었고 주재선박으로는 벼 250석이 적재 가능한 운수선(運輸船) 50척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역은 주의 서쪽 15리에 있다고 하였고, 『여주목읍지』에는 “주의 서쪽 25리에 있으며, 중등마 5필과 하등마 1필이 있고 역리 18명이 있다.”고 되어 있다. 마을에는 “강릉가는 파발말이 있었다”고 전한다. 『대동여지도』에는 원주에서 오는 길이 양화역을 거쳐 양근·이천방면으로 지나갔으며 여주에서 오는 길은 이포를 거쳐 양평 방면으로 뻗어 있어 양화역이 두 길의 교차로 상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양화나루를 건너 대신면 방향으로 가면 양근(양평), 곡수, 지평(지제), 원주 방면으로 나갈 수 있어 양화나루와 양화역 일대는 여주 서북방의 교통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