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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파사산성

□ 소재지 :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경계의 파사산
□ 시 대 : 삼국~조선
□ 지정사항 : 사적 제251호

대신면 천서리와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의 경계에 있는 파사산(婆娑山, 해발 230.5m)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으로 발달한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이래의 석축 산성이다. 성곽의 전체 둘레는 935.5m이며, 현존하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6.25m이다. 처음 축초된 시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삼국시대로 알려져 왔는데, 최근의 발굴조사에 의해 당대의 성벽 유구가 밝혀짐으로써1) 사실로 확인되었다.

한편 삼국시대 이후 파사산성에 대규모의 수축은 임진왜란을 맞아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위상이 부각됨에 따라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발의로 승장(僧將) 의엄(義嚴)에 의해 1,100보에 이르는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의해 파사산성은 현재 사적 제25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1999년 이후부터 3차에 걸쳐 전문기관에 의해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짐에 따라 유적을 둘러싼 대체적인 사항도 밝혀지고 있다.2)

산성이 자리 잡은 파사산의 해발 고도는 230.5m로 결코 높지 않다. 그러나 주변 일대가 대부분 낮은 구릉성 산지여서 상대적으로 우뚝 솟아 보이며,3) 멀리 이천(利川) 방면에서 바라보면 정상부가 원추형으로 솟아 있다. 무엇보다도 남한강이 동남에서 서북으로 산을 끼고 굽이치는 형세를 이루고 있어, 상·하류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서쪽으로 남한강을 경계로 술천성(述川城)이 자리 잡은 태봉(胎封) 주변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방의 시야가 확 튀어 전망이 아주 좋은데, 맑은 날씨에는 북으로는 양평의 용문산(龍門山)까지 조망된다. 따라서 일찍부터 천연의 요새지로 주목되고, 산성을 비롯한 관방시설의 축조가 이루어졌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볼 수 있는 지형과 지세를 이루고 있다.

파사산성이라는 명칭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 파사왕대(80~112)에 축성되었기 때문이라거나, 삼한 소국의 하나인 파사국(婆娑國)의 존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본래 파사산성이 위치한 대신면 천서리 지역은 남한강을 경계로 서쪽의 금사면 이포(梨浦)지역과 마주보고 있는데, 이 이포지역에는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하나의 군현으로서 천령현(川寧縣)이 자리잡고 있었다.

더욱이 이 천령현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하는 말갈(靺鞨)과 백제(百濟) 및 고구려(高句麗)의 접경을 이루었던 술천군(述川郡)의 후신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에 삼한시기의 소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추정은 성벽 내부에서 출토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라든가, 삼국시대 전기의 승석타날문토기, 백제의 타날문토기 등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뒷받침된다고 하겠다. 다만 이 술천군, 천령현의 읍치는 파사산성이 위치한 대신면 천서리 지역이 아닌, 남한강 건너편의 금사면 이포리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이포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존하는 파사산성 성벽의 상당 부분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조선시대 파사산성에 대한 수축은 앞서 언급한대로 영의정 유성룡의 발의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의 고제(高弟)인 의엄이 승군 도총섭에 임명되어 공사를 담당하였다. 파사산성 수축의 결정은 1595년(선조 28) 3월 1일에 이루어졌는데,4) 실제 공사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6월 초순경에나 시작될 수 있었다.5) 그리고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5개월 정도인 1596년(선조 29) 11월에 수축이 완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6) 전쟁을 수행중인 와중에서도 대규모로 성곽이 수축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수도 한성과 충주지역을 연결하는 수로상의 최대 요충지였던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파사산성의 전체 둘레는 935.5m로 내부면적은 약 1,200평이며, 부정형의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초축 성벽의 경우 암반층을 기저부로 잘 다듬은 장방형의 석재를 이용하여 축성하였고, 뒤에 수축할 때는 초축 성벽이 허물어진 부분에 일정 부분 부정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수축은 회절부의 축조방식을 통해 볼 때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체로 고려 및 조선시대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성벽의 일부 기단부에 보축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성벽은 내외협축과 내탁법을 지형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석재는 30~40cm의 장방형 화강암을 이용하였으며, 바른층 줄눈쌓기의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틈이 생기는 부분에는 잔돌을 채워 넣었다. 내벽의 경우에는 지형에 따라 0.5~5m의 높이로 쌓았으며, 하부의 폭은 10m 내외이다.

내부시설로는 문지 2개소, 수구지 1개소, 치 3개소, 우물지 1개소, 건물지로 보이는 8개의 평탄지가 확인되었다. 문지는 남벽과 동벽에 각각 1개소씩 자리하는데 동문지가 잘 남아있다. 동문은 문의 양 옆에 높이 120cm, 상부 폭 40cm의 고주형 초석이 있으며 그 앞에 ㄱ자 형태의 옹성을 함께 설치하여 문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한편 파사산성 정상부 서북쪽 바로 밑에는 축성의 주인공으로 전해지는 옛 장군의 석각이라는 마애여래상이 1기 있다. 거대한 암벽에 음각한 것으로 고려시대의 불상인데, 당시 파사산성의 운영과 관계된 사찰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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