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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고려시대의 유물산포지

지금까지 조사된 여주지역의 고려시대 유물산포지는 능현리 유물산포지2(여주시 능현동 381전 일대), 신진리 유물산포지1(여주시 신징동(관터골) 25-4전), 연양리 유물산포지4(여주시 연양동 70전 일대), 연양리 유물산포지6(여주시 연양동(연촌마을) 257전 일대), 연양리 유물산포지7(여주시 연양동(양촌마을) 산8-1임 일대), 월송리 유물산포지(여주시 월송동 23, 24전 일대), 하거리 유물산포지(여주시 하거동 산5-1임 일대), 하품리 유물산포지(산북면 명품리 295전 일대), 금사리 유물산포지2(금사면 금사리(김새골) 359전, 359-1전 일대), 전북리 유물산포지3(금사면 전북리(살띄마을) 산46-2임 일대), 귀백리 유물산포지1(흥천면 문장리(토물골) 371-1전, 371-2전 일대), 문장리 유물산포지1(흥천면 문장리(토물골) 205전 일대), 신근리 유물산포지2(흥천면 신근1리 736-12임 일대), 신근리 유물산포지4(흥천면 신근2리 324-1전 일대), 보통리 유물산포지2(대신면 보통리 14답 일대), 송촌리 유물산포지3(대신면 송촌2리 산56-4임), 상교리 유물산포지1(북내면 상교리(점골) 290-1전 일대), 상교리 유물산포지2(북내면 상교리 270전 일대), 상교리 유물산교지3(북내면 상교리 275-1전, 275-2전 일대), 상교리 유물산포지4(북내면 상교리 353-2전 일대), 석우리 유물산포지1(북내면 석우리 68-1전, 69일대), 중암리 유물산포지4(북내면 중암리 579전 일대), 가야리 유물산포지2(강천면 가야리 182-3전 2답 일대), 가야리 유물산포지5(강천면 가야1리(암말) 135, 145번지 일대), 도전리 유물산포지1(강천면 도전3리(다랑고개골) 295전 일대), 도전리 유물산포지3(강천면 도전2리(전거원동) 887전 일대), 도전리 유물산포지4(강천면 도전1리(탑전동) 932-1전 일대), 왕대리 유물산포지(능서면 왕대리 79답 일대), 대신리 유물산포지(가남면 대신리 120번지 일대), 상활리 유물산포지(가남읍 상활1리 102-1전 일대), 송림리 유물산포지11(가남읍 송림리 485번지 일대), 심석리 유물산포지1(가남면 심석1리(공심동) 63전 일대), 오산리 유물산포지(가남읍 오산리 205전 일대), 은봉리 유물산포지1(가남읍 은봉리 148-1전 일대), 뇌곡리 유물산포지2(점동면 뇌곡리 80번지 일대), 부구리 유물산포지1(점동면 부구리 80-2전 일대), 장안리 유물산포지2(점동면 장안1리 587·588·589전 일대)등이다.

나말여초, 특히 후삼국의 통일과정에서 여주지역은 일찍이 궁예의 태봉 및 고려의 판도 아래에 있으면서 전쟁의 와중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여주지역은 궁예나 왕건에 의해 결코 관심 밖에 놓여 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선 고달사의 경영 및 번성에 주목해볼 수 있다. 즉 신라 하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파의 개산조인 원감대사 현욱이 경덕왕의 요청에 의해 고달사에 주석하게 된 사실은 그만큼 신라와 고려왕실의 관심의 결과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려전기 여주지역 불교문화와 관련해서는 고달사와 원향사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달사가 잘 알려져 있지만 최근 발굴조사 결과 원향사도 고려전기 지방불교를 대표하는 유적의 하나로 볼 수 있음이 밝혀졌다. 고달사는 봉림산문 중심 사찰의 하나로 이해되지만 본격적인 번성을 구가하는 것은 원종대사 찬유가 주석하기 시작한 10세기 초부터다. 이때 찬유는 국사의 지위에 있으면서 고려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광종대의 교단 정비와 사상통일에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면서 일대 번성을 구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현존하는 고달사지 승탑, 원종대사탑 등의 화려하고 전형적인 조각수법이나 규모 등을 통해서 어렵지 않게 추정해볼 수 있다.

한편 원향사의 경우는 구산선문 중 사자파의 제2조인 징효대사 절중의 주석 사실을 통해 통일신라시대부터 경영된 사찰임이 밝혀졌는데, 그 번영기는 역시 10세기 후반 이후의 고려전기로 추정되었다. 최근의 조사결과 건물지 11동을 비롯하여 담장지, 암거 등의 유구와 다양한 명문기와, 청자, 동종 등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여주지역은 그 세력형성 과정을 볼 때 조선왕조의 전신인 궁예의 기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궁예나 왕건의 입장에서도 주요 관심지역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호족이라고 부른 이 지역의 세력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성씨의 확산은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특히 각종 성씨의 확산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태조왕권의 정책에 힘입어 더욱 확대되었는데 여주지역에서는 7개의 토성가문이 확인된다. 이는 이만큼 이 지역에 적지 않은 토착세력, 즉 호족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하였을 것인데 여주지역의 경우 모두 토성만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친정부적 경향을 보이면서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여주지역에서 이러한 여러 성씨들 중에서 일찍이 고려 초부터 중앙의 문벌귀족으로 성장한 가문은 여흥 민씨를 들 수 있다.이 여흥 민씨는 고려 중기 이후로는 명문대족으로 성장해간다.

이외에 고려 전기 여주지역의 귀족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로서는 최근에 발굴조사된 북내면 중암리유적이 있다. 중암리유적은 199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여주지역의 가마터를 지표조사 과정에서 해무리굽완과 화형접시, 갑발 등이 수습되어 고려 초기의 가마터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1~2003년까지 2차에 걸쳐 경기도 박물관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운영시기를 10~11세기로 추정할 수 있는 백자가마터로 밝혀짐에 따라 도자사 연구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이 유적은 여주지역이 이미 고려 초부터 도자생산 중심지 중의 하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주지역의 지역명은 경덕왕대에 소천군과 항효현에서 각각 천녕군과 황려현으로 개칭되어 전자는 고려건국 이후까지, 후자는 1257년(고종 44)까지 318년에 걸쳐 사용되었다. 따라서 황려현은 현재의 여주 읍내지역과 관련하여 고려시대에는 가장 오래 쓴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려의 지방제도 정비는 성종대에 이어 현종대에 대대적인 개편을 통해 완성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주지역은 각각 천녕현은 광주목에, 황려현은 원주목의 임내, 즉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채 속현으로 편성되기도 하였다.

여주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려시대 유물산포지는 자기, 토기, 기와류 등이며 대부분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유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에서 능현리 유물산포지2나 상교리 유물산포지1의 경우에는 유물 양상으로 보아 중세시대의 생활유적이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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