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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통일신라시대 유물산포지

지금까지 조사된 여주지역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산포지는 연양리 유물산포지5(여주시 연양동 49전 일대), 금당리 유물산포지2(가남읍 금당리 365-2·3전 일대), 삼합리 유물산포지1(점동면 삼합2리 132, 133전 일대) 등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3세기에 걸친 공방전은 최종적으로 신라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른바 통일신라가 성립된 것이다. 삼국의 통일 이후 신라의 중앙정부에 주어진 주요 과제 중 하나는 본래보다 3배정도 넓어진 영토와 주민들을 효율적이며 안정적으로 지배해 나가는 것이었다. 통일신라기의 여주지역은 황효현과 소천군이라는 두 군현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한편 통일신라기 여주지역은 이러한 군현 명칭의 변경 외에 전국적인 지방군사 조직인 10정의 하나인 골내근정이 설치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당시 한주지역의 군사조직으로 황주인근에 남천정이 설치되었음에도 또다시 골내근정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만큼 여주지역이 갖는 군사적 정치적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선 고려해볼 수 있는 것은 여주지역이 한강유역의 군현 가운데 충주의 중원경과 삼국각축의 중심지였던 북한산성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다.

통일신라시기 여주지역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사항의 하나는 골내근현의 치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 골내근현의 치소는 당시의 유적, 유물상의 분포를 통해서 볼 때 오늘날의 여주 읍내지역이라고 보기에는 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통적인 소도읍의 형성은 대체로 통일신라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여주 중심지역도 일단 이 시기, 적어도 경덕왕대 이후로는 그 모습을 갖추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의 각축과정에서 정복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설치한 주 또는 정은 기본적으로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이라는 측면에서 차이를 갖지만 그 치소는 잦은 변경과 함께 중복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이는 삼국이 상호간에 치열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이었으므로 군사적 우열에 따라 전략적 변동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기 여주지역의 모습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파사산성이다. 파사산성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대신면 천서리에 속해 있다. 이 산성은 남한강 하류에 위치하여 여주, 이천, 양평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어 국가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여러 차례 학술조사도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벽의 경우 신라, 고려, 조선대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음이 밝혀졌고, 성내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 유구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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