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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내룡리 고분군

국립중앙박물관이 1989년 조사에서 확인하고 전방후원분으로 추정한 고분이다. 그 내용을 일단 먼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여주-양평을 이은 331번 국도변 동쪽에 위치한 전방후원형 고분이다. 331번 국도는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金塘川)을 따라 나 있는데, 내룡리는 선돌과 고인돌이 발견된 석우리와 직선거리로 2km 떨어져 있다. (중략) 고분은 현재 논으로 경작되는 안말의 평지에 위치한다. 전방부는 논 경작시에 동남쪽 부분이 잘려서 앞으로 갈수록 좁아진 형태이다. 전방부의 동북쪽 하단을 따라 논둑이 돌아가고, 그 사이에 물고랑이 형성되어 있다. 후원부는 후대에 민묘 1기가 들어서면서 분구가 일부 파괴되었다. 후원부의 동북면 군데군데 돌들이 박혀 있다. 전방부는 길이 20m, 높이 3m, 후원부는 직경 20m, 높이 5m로서 전체길이는 40m에 달한다. 전방부와 후원부의 길이는 1:1의 비율을 이룬다.”

현재 이 추정고분의 길 건너에는 광진축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내룡리 안말의 뒷산이 자리한다. 후원부의 민묘는 현재 이장되어 없으며, 후원부의 서쪽부분이 심하게 삭평된 상태이다. 삭평면의 군데군데 우두대(牛頭大)의 할석들이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 독립구릉이 주변의 구릉이나 야산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점과 평면형태가 완전한 전방후원형이란 점에 착안하여 일단 전방후원형 고분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1916년에 측량하여 1917년에 제작한 『근세 한국오만분지일 지형도』에는 지금의 331번 국도가 야산 언저리를 잘라 지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과거에는 우두산에서 남주하여 동쪽으로 분기한 가지능선의 말단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추정고분 주변이 경작지인 점과 연관하여, 경작지 조성시 자연구릉이 삭토되는 과정에서 전방후원형의 소구릉이 자연히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추정고분으로 기록하여 유적으로 관리토록 하고, 향후 조사여건이 마련되면 확인조사를 거쳐서 그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상으로 여주지역의 고분을 자세히 소개하고, 고분군별로 필자 나름의 간단한 검토를 하였다. 그러면 삼국시대 여주지역의 읍치에 대한 위치비정의 문제가 제기된다. 결론적으로 계양천 일대를 황려현(黃驪縣)의 중심권역으로 설정코자 한다. 그리고 그 치소는 지금의 조선시대 신진역(新津驛)이 있었던 신진리 일대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경기도를 대표하는 매룡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하거리 고분군, 상거리 고분군 등이 계양천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은 탄천의 상류지역에 대규모의 용인 보정리 고분군이 자리하고, 그 일대가 삼국시대 용인의 읍치인 거서현(巨黍縣)의 치소인 사실을 통해 방증된다. 다음으로, 신진역 부근에 신진리 유물산포지가 보고되어 있고, 이 산포지가 관터로 불리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신라후기 군현의 치소가 조선시대까지 행정중심으로 자리잡는 일반적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다음으로 신진역에 부라우나루가 있었던 사실이다. 근대에 여주대교와 이호대교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이 신진역 주변이 교통의 요충지였던 것으로 판단되며, 과거 교통의 요충지가 결국 읍치소였던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여주지역과 국원경이 설치된 충주 루암리지역과 수로로 바로 연결되는 수상교통의 요충지인 사실은 위의 가정을 더욱 보강해 준다. 아마 삼국시대의 여주는 주치(州治)가 설치된 서울 강남지역과 국원경(國原京)이 설치된 충주지역을 연결하는 행정·경제의 중간거점일 가능성이 크며, 이는 매룡리 고분군과 같은 대규모 고분군의 조영을 통하여 더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마지막으로 이 일대에 고고미술유적이 집중된 현상이다. 연양리유적을 비롯하여 흔암리 선사유적, 신천역지, 능현리 토기산포지, 연양리 구석기출토지, 우만리유적 등이 집중 분포하는 사실은 이 일대가 과거 여주의 중심권역이었음을 물증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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