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HOME 주제 문화유산 선사·고고유적 고 분 하거리 방미기골... 축조집단과 시기

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축조집단과 시기

하거리 고분군 묘제의 특징은 장방형의 석실에 매우 폭이 좁고 짧은 연도가 달린 평면형태인 점이다. 이런 구조는 전형적인 횡혈식 석실분의 변형, 혹은 지방형으로 볼 수 있다. 즉, 횡구식 석실분의 매장방식에 연도의 최소기능만이 부가된 형태로 파악된다. 이는 경주지역의 횡혈식 석실분과 비교되며, 동일 지역의 매룡리의 전술한 T자형 석실분과도 대조된다. 그리고 보고자가 분류한 횡구식 석실분 역시 전형적인 횡구식과는 구조적인 차이가 보이는 것들로 입구부로 이용되는 단벽의 상반부 좌측 혹은 우측 절반을 횡구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횡구식 석실분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런 횡구식에서 횡혈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형태가 아닌가 판단된다.

다음은 장식(葬式)과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부부장(夫婦葬)을 기본으로 하는 이인장(二人葬)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나, 3인 이상의 가족장이 가능한 구조(3호분)도 드물게 확인되며, 시상대 1기만이 축조된 상태인 것도 확인된다. 한편, 석실분에서는 관못이 전혀 확인되지 않고 머리부분이 안정적으로 고정될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오목하게 깎아낸 두침이 확인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관을 사용하지 않고 염(殮)된 상태로 바로 매장하였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유물은 병형토기와 평저호가 가장 기본적이다. 소성은 병형토기는 경질이고, 평저호는 연질이다. 이런 차이는 그릇의 용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토기구성은 전형적인 신라토기와는 비교되며, 오히려 백제고분의 토기구성과 유사하다. 한편, 신라토기의 전형적 단각고배와 부가구연대부장경호가 매납된 고분도 확인되는데, 26호분에서는 대부장경호 2점과 유개고배의 뚜껑 1점이, 28호분에서는 대부장경호 1점이, 29호분에서는 무개고배와 토기완, 고배뚜껑 각 1점이, 30호분에서는 고배 1점과 뚜껑 3점이 수습되었다.

이 고분군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기간 축조된 고분군이다. 그러면 이 고분군의 초축시기는 언제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발굴된 고분 중에서 묘제상으로 가장 초기적인 구조를 보이는 29호 석실분이 주목된다. 이 고분은 일단 횡혈식이 아닌 점, 균형잡힌 형태에 일단투창을 뚫은 무개고배가 출토된 점, 고배뚜껑에서 꼭지폭이 구경의 1/2 정도인 점 등으로 미루어 6세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마지막으로 이 고분군 중에서 삼국시대 고분의 축조집단의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출토토기의 기본적인 특징이 백제토기의 그것과 유사한 점을 들어 그 백제고분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결론적으로 하거리 고분군은 신라고분으로 판단된다. 그 이유는 우선, 신라토기 후기 토기의 존재로, 이런 신라토기가 매납된 사실은 적어도 이들 고분이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이후에 축조되었으며, 신라의 영역이 된 이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주변 매룡리 고분군의 존재로, 지근한 매룡리에 대규모의 신라고분이 존재한 사실은 적어도 이 하거리 고분군 역시 신라고분으로 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제기한다. 셋째로, 장법(葬法)에서 두침(頭枕)이 확인되는 점으로, 이런 두침(頭枕)의 사용 역시 신라의 장법(葬法)이다.

결국, 하거리 고분군의 피장자는 신라묘제를 강제받은 신라의 신민(新民), 즉 토착(土着)의 백제인(百濟人)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사민정책으로 한강유역으로 집단이주당한 신라인이나 복속된 가야인과는 구별되며, 재지민(在地民)으로 전통의 토기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신라중앙에 의해 신라묘제를 채택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런 추측에 기초할 때, 백제토기문화의 요소, 변형의 횡혈식 석실분의 존재, 그러면서도 신라토기가 출토되는 사실 등이 나름대로 해석된다.

맨 위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