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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집터

B지구의 서쪽에 위치한다.

집터의 평면 형태는 전체적으로 보면 네모꼴이지만, 부분적으로 각이 져 5~6각형에 가깝다. 그리고 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만들어진 凸자형 집터이다. 크기는 665×660㎝이고 움 깊이는 20㎝이며 출입 시설의 너비는 150㎝쯤 된다. 출입구의 바닥은 집의 바깥으로 갈수록 약간 경사를 이루면서 높아지며, 찰흙이 부분적으로 깔려 있었다.

집터의 바닥은 별다른 시설 없이 모래질 토양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부분적으로는 숯과 불탄 흙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출입 시설 부근에는 불탄 흙이 많이 쌓여 있었다.

부뚜막 시설은 집터의 북동쪽 모서리에서 나왔는데 굴뚝 부분은 집터의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다. 부뚜막의 크기는 145×60㎝, 높이 25㎝쯤 되며, 집터의 바닥면에 찰흙으로 만들었다. 아궁이와 천장 부분이 조금 내려앉았지만, 비교적 잘 남아 있었다. 또한 굴뚝 시설의 가운데에서 앞쪽으로 약간 치우쳐 40×20㎝ 크기의 토기를 걸었던 솥걸이부가 뚫려 있으며 구멍의 가운데에 지지하는 다리가 놓여 있다. 연기가 나가는 길은 아궁이쪽은 넓고(40㎝ 안팎) 굴뚝 부근으로 갈수록 점차 좁아지며(10㎝쯤), 흑색으로 그을렸다.

유물은 집터의 가운데에서 거꾸로 뒤집힌 단지 1점과 토기 입술 조각들이, 부뚜막 시설 옆에서 쇠날이 발견되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양리유적은, 여주는 물론 한강유역의 중부지역 초기삼국시대 문화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연양리유적의 입지조건을 살펴보면 남한강 옆의 충적대지 위에 있으면서 주변에 낮은 야산과 배후습지가 있어 한강유역에서 조사된 중부지역의 다른 유적과 비슷하다. 지금까지 중부지역에서 발굴된 하남 미사리유적을 비롯한 가평 마장리, 춘천 중도, 이천 효양산, 충주 하천리, 단양 수양개, 파주 주월리, 수원 서둔동 가운데에서 이천 효양산은 강과 떨어진 산의 정상부에, 서둔동유적은 내륙의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위치할 뿐 나머지는 모두 연양동과 같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생업경제를 보면 이 시기의 유적에서 대규모의 벼농사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춘천 중도와 횡성 둔내리유적에서 조, 콩이 발견되어 잡곡 농경이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배후습지 주변에서 약간의 벼농사와 충적대지에서 잡곡 경작을, 그리고 강에서 물고기잡이 등으로 살림을 꾸렸을 것이다.

특히 배후습지는 집의 지붕과 벽체를 만드는 주요한 재료인 갈대를 쉽게 많이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중요하며, 연양리유적의 집터에서도 불에 탄 갈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연양리유적에서 조사된 집터의 자리와 평면 생김새를 살펴보면 많이 파괴되고 현재 부분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된 상태라 해석에 어려움이 많다.

먼저 집터의 긴 방향을 보면 부분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적 옆으로 흐르는 남한강의 방향과 나란한 상태다. 그리고 집터의 배치는 B지구의 경우 대략 10m 거리를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어 일정한 거리에 걸쳐 의도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1)

평면 생김새는 긴 네모꼴이 4기로 제일 많고 네모꼴은 1기로 출입구 시설이 있는 凸자 모양 집터다. 이처럼 네모꼴 집터에 돌출된 출입 시설이 있는 집터가 중부지역에서는 보편적으로 널리 발견되고 있다.

집터시설 가운데에는 6호에서 一자 모양의 구덩이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것이 청동기시대의 집터에서도 나오며, 초기삼국시대 유적으로는 이천 효양산유적, 영암 신연리유적, 순천 낙수리유적, 경주 황성동유적에서 조사되었다. 이런 구덩이의 기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배수나 습기를 방지하는 시설로 해석한다. 그러나 연양리 6호 집터의 경우, 집터의 바닥은 배수가 잘 되는 토양임을 고려할 때 이 구덩이의 기능은 벽체를 보완하기 위한 시설의 하나로 여겨진다.2)

화덕자리는 난방과 보온, 취사를 목적으로 설치하는 시설물이며 이 유적에서는 냇돌을 둥글게 돌린 위석식(圍石式)과 냇돌을 깔고 그 위에 찰흙을 덮은 부석식(敷石式)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위석식 화덕자리는 집터의 평면 생김새가 둥근꼴인 7호에서만 확인되었다.

냇돌을 깐 부석식 화덕자리는 중부지역의 초기삼국시대 집터에서 가장 널리 나오는 것으로 연양리유적은 2호, 6호, 10호, 11호 집터에서 발견되었다. 이 화덕자리가 발견된 집터는 모두 긴 네모꼴이며, 화덕의 위치는 집터의 북쪽으로 치우쳐 놓여 있었다. 화덕의 평면 형태는 둥근꼴, 타원형이며 만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2호 집터의 화덕은 아래쪽에 토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화덕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화력을 높이고 잔열을 오랫동안 지속시키기 위해 바닥의 습기를 차단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화덕자리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찰흙 띠가 돌려져 있는데 이것은 불씨가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한 일종의 방화 시설로 여겨진다.3)

부뚜막 시설은4)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1호 집터처럼 판자돌과 찰흙으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12호처럼 찰흙으로만 만든 것이다. 이런 시설이 설치된 집터의 평면 형태는 긴 네모꼴과 凸자형이다.

부뚜막은 모두 집터의 북동 모서리 근처에 자리하며, 방향은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연양리유적에서는 발굴 범위에 비하여 여러 종류의 많은 토기가 출토되었다.

집터 안에서 찾은 토기는 모두 99점으로 그 가운데 경질토기는 4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연질토기이다. 연질토기는 타날문토기와 무늬가 없는 토기로 나누어지는데 타날문토기가 28점으로 무늬가 없는 토기가 더 많다. 그리고 무늬가 없는 토기 가운데 입술이 바깥으로 바라진 것은 약 3분의 2 정도이고, 타날문 토기 가운데 단지가 19점으로 많은 양을 차지한다.5)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가운데에는 타날문토기 이 외에도 여러 가지의 마무리 손질 흔적이 보이는데 주로 나무결 흔적, 물손질 정면 흔적, 나무판자 누르기 흔적, 나무판자 문지르기 흔적, 손가락 흔적 등이 있다.

연양리유적에서는 제철 유구가 발견되어 진천 석장리나 경주 황성동유적과 함께 초기 철기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어 중요하다.

철 생산은 크게 제련 과정, 용해 과정, 단야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유적에서는 제련과 용해 과정의 유구는 찾을 수 없고, 단야 과정에서 쓴 듯한 작은 단야 관련 화덕 2기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50㎝ 안팎의 타원형인데 2호 집터의 것은 2회 이상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화덕 바닥에는 매우 높은 온도에서 나타나는 철 함유량이 많은 찌꺼기와 거의 유리질화된 노벽이 남아 있었다.

철 생산에는 많은 과정과 재료, 작업에 필요한 공간, 고도의 기술을 가진 집단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연양리유적은 주거공간으로 여겨지며, 집터 안에서 쇠날, 쇠칼 등 아주 간단한 철제 생활도구만 발견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살림을 꾸린 사람들은 철기를 생산·제작하는 전문집단이 아니고 살림터에서 단야 관련 화덕을 이용하여 간단한 연모를 제작하던 사람들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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