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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암리 선사유적

□ 소재지 : 점동면 흔암리 산2-1 일대
□ 시 대 : 청동기시대
□ 지정사항 :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

점동면 흔암리 흔바위마을의 남한강 언저리에 해발 123m의 낮은 산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데 이 산의 경사진 곳에서 청동기시대의 많은 집터가 나왔다. 이 유적은 1962년 처음 알려진 다음, 서울대학교 박물관과 고고학과에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7차례에 걸쳐 모두 16채의 집터를 발굴하였다.1)

흔암리 유적의 집터는 산경사면을 이용하여 안쪽을 파 ‘ㄴ’ 자 모습을 한 상태에서 집을 지었으며, 평면은 모두 긴 네모꼴이다. 이렇게 산기슭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만든 것은 남양주 수석리 유적과 비교된다. 거의 대부분 산흐름의 방향과 나란하여 주변의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였던 것 같다. 1~3호 집터는 남북으로 뻗은 산의 능선 위에, 4~16호 집터는 동서방향인 능선 위에 자리하고 있다.

한편 움의 깊이는 15~120cm로 집터마다 차이가 있고 같은 집터에서도 네 벽이 서로 달라 몇몇 집터는 지붕의 서까래가 땅에 닿지 않는 반움집이었던 듯하다.2)

집터의 크기는 11.6㎡~42.0㎡로 상당히 다양한 편인데 이것은 집터의 쓰임새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집터에서 찾은 시설로는 나들이자리·화덕자리·구멍자리·벽과 선반이 있다. 나들이자리는 1호 집터에서 나왔는데 드러난 쪽이 가운데이고 이곳에서 집터의 바닥 쪽으로 조금씩 낮아져 경사를 이루고 있다.

화덕자리는 5호·8호·12호 집터에서만 조사되었으며, 나머지 집터는 밖에 이와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화덕자리는 대부분 집의 가운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특별한 시설 없이 맨바닥을 파서 타원형으로 만들었다. 8호 집터의 것은 찰흙을 쌓아 만든 U자 모양으로 지금까지 찾은 예가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리고 12호 집터에서는 3개를 찾았는데 이처럼 한 집에서 3개가 조사된 예는 무산 범의구석 6호 집터가 있으며, 최근 대형의 긴 네모꼴 집터가 발굴 조사되고 있어 이런 예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멍자리는 저장구멍과 기둥구멍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저장구멍은 12호 집터에서 7개가 찾아졌을 뿐 다른 집터에서는 없었다. 그런데 흔암리 집터에서 조사된 여러 정황들을 보면 살림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던 것으로 여겨져 저장시설은 꼭 필요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4호 집터 같은 것은 구조나 시설(바닥)로 보아 공동으로 사용하던 창고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기둥구멍은 8채의 집터에서 나왔는데 그 모습은 수직으로 뚫린 것과 조금 기울어져 뚫린 것 등 2가지가 있다. 그리고 12호와 14호 집터는 긴 네모꼴이면서 바닥에 찰흙을 깔아서 다진 점·화덕은 바닥을 파거나 그대로 이용한 점·바닥 안쪽에 3줄의 기둥구멍이 있고 또 벽 쪽에 일정 간격으로 작은 기둥구멍이 있는 점 등은 팽이형토기가 나오는 유적의 집터와 아주 비슷하여 이곳 흔암리 유적과 서북지역 팽이형토기문화와의 교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주목된다.3)

그리고 집터의 시설을 보면 13호와 14호 집터에서는 흙벽으로 이루어진 칸막이가, 14호 집터에서는 선반을 찾을 수 있었다. 14호 집터에서는 칸막이를 경계로 하여 출토된 유물이 뚜렷이 구분되는데 집터의 남쪽에서는 덜된 석기·모루돌·숫돌 그리고 다듬질된 석기가 나와 남성이 석기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며, 북쪽에서는 완전한 토기와 숫돌이 몇 점 나와 남자보다는 주로 여성이 살림을 꾸렸던 곳으로 해석하기도 한다.4)

또한 14호 집터의 선반은 바닥보다 20cm쯤 높은 곳에 만들어져 있었는데 석기들이 남아 있어 보관을 하던 곳이었던 것 같다.

흔암리 유적에서 꾸려진 당시의 살림살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는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는데 이곳의 집터가 모두 발굴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

흔암리 집터에서 나온 석기는 간돌검·돌화살촉·돌창·반달돌칼·가락바퀴·갈돌과 갈판·모루돌·돌도끼·바퀴날도끼 등이 있다.5)

간돌검은 12호 집터에서 한꺼번에 5점이 나와 주목된다. 흔암리 집터에서 나온 간돌검은 1단과 2단 자루식이 섞여 있는데 한강유역에서 찾은 2단 자루식 간돌검으로는 꽤 이른 시기에 속한다. 자루의 단면은 렌즈꼴이며, 검의 몸체는 렌즈와 마름모꼴이 같이 있다.

돌화살촉은 흔암리 유적에서 가장 많이 나온 석기로 생김새는 삼각형만입촉(三角形彎入鏃)·슴베촉[1단·2단 莖鏃]·원통모양[圓筒形]·돌바늘모양[石針刑]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삼각형만입촉이 가장 많다. 생김새에 나타나는 특징을 보면 삼각형만입촉은 동북지역에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이 지역과의 문화전파나 교류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고, 2단슴베촉은 서북지역의 팽이형토기유적에서 많이 나오고 있어 돌화살촉으로 보면 두 지역의 문화요소가 섞여 있는 양상이다.

돌창은 14호 집터에서 1점이 나왔는데 한강유역에서는 처음 찾은 것이다. 쓰임새는 유적의 입지조건으로 보아 물고기잡이를 할 때 작살로 이용된 것 같은데 이것은 민무늬 토기시대의 다른 유적보다 그물추가 많이 나오는 것으로도 뒷받침된다.

반달돌칼은 생김새로 보아 단주형(短舟形)이 가장 많으며, 만든 돌감은 점판암·사암·편암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점판암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돌도끼는 안팎날(조개날)간돌도끼·외날간돌도끼·뗀돌도끼 등이 나왔다. 이 가운데 뗀돌도끼의 쓰임새를 보면 개간할 때 땅을 파는 역할을 하였던 것 같아 흔암리 유적의 생업경제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돌도끼를 가지고 부여 송국리 유적과 비교한 연구가 있는데 이것을 보면 흔암리 유적에 많은 뗀돌도끼가 송국리 유적에는 없고, 나무를 다듬는 데 쓰인 것으로 보이는 외날간돌도끼가 많아 좋은 비교가 된다.

이것은 유적의 입지조건에 따른 차이에 의한 살림살이의 방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토기는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늦은 빗살무늬토기·구멍무늬토기·팽이형토기·여러 생김새의 붉은간토기·골아가리토기·덧띠토기가 있다. 토기로 보아 구멍무늬토기·붉은간토기·골아가리토기 등의 동북지역요소와 팽이형토기 계통의 서북지역 문화요소가 섞여 있는 양상이다. 토기의 생김새나 종류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으로는, 먼저 구멍무늬토기 단지모습이나 겹입술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지역의 토기문화 속성이 섞인 양상은 구멍무늬와 빗금무늬, 골아가리와 빗금무늬가 있는 독특한 것이라 ‘흔암리식 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6)

팽이형토기는 변형된 형태인데 입술부분이 겹입술이고 바로 아래쪽에 빗금무늬가 있는 모습이다.

한편 한강유역의 흔암리유적은 동북지역과 서북지역의 토기문화가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밑바탕이 되는 지역적인 요소가 다 나타나고 있는데, 변형된 팽이형토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서북지역이라는 견해7)와 반달돌칼·가락바퀴 등의 석기에 동북지역의 문화요소가 많고 구멍무늬토기의 변화과정으로 미루어 동북지역이라는 의견이 있다.8) 이러한 문제는 한강유역의 민무늬토기문화가 성립되는 초기과정이 분명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이고, 현재 흔암리 유적의 발굴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된다.

또한 흔암리 유적의 토기를 좀더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 암석분석을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밝혀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9)

  • ① 토기의 바탕흙은 찰흙질 광물(clay mineral)이고 비짐으로는 석영·정장석·사장석·각섬석·녹염석·견운모 등이 쓰였으며 이 가운데 거의가 석영과 장석이다.
  • ② 붉은간토기와 민무늬토기의 바탕흙을 비교하여 보면 붉은간토기는 기질(基質, groundmass)보다 거정(巨晶, phenocryots)이 훨씬 낮은 비율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바탕흙을 정선하였음을 보여준다.
  • ③ 민무늬토기와 구멍무늬토기는 성분구성에서 뚜렷한 차이가 없었지만, 붉은간토기는 민무늬토기에 비하여 석영과 장석이 상당히 많았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제천 양평리 집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 지역적·시기적·토기의 쓰임새 등에 있어 하나의 공통된 양상으로 여겨진다.

흔암리 유적에서 찾은 농경자료는 12호와 14호 집터에서 나온 것으로 탄화된 쌀(Oryza sativa L)·조(Setaria talica B.)·수수(Andropogon sorghum B.)·보리(Hordeum sativum L.) 등이 있다.10)

이 가운데 쌀의 길이와 너비의 잰값 비율은 12호 집터가 1.62㎜, 14호 집터가 1.74㎜로 나타나 모두 단립형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되었지만, 이것은 껍질이 벗겨진 상태(왕겨)에서 잰 것이라 이것을 통하여 벼의 품종을 구분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한편 흔암리 집터에서는 쌀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곡식이 나와 혼합농경을 하였던 것 같으며, 이와 비교되는 유적으로 평양 남경유적(36호 집터)을 들 수 있다.

흔암리 유적의 연대에 관하여는 크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와 출토유물을 통한 상대연대측정이 있다. 지금까지 다른 유적과 비교해볼 때 많은 방사성탄소연대 측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유물을 통한 비교결과 중심연대를 B.C. 7세기경으로 잡은 실정이다.

하지만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값으로 보아 다시 계산하기를 하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12호 집터는 B.C. 16세기경으로 밝혀지고 있어 흔암리 유적은 한강유역권의 민무늬토기유적 가운데 이른 시기에 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유적은 어느 한 시기에 형성된 유적이 아니라 서로 겹치는 집터·출토유물 그리고 연대측정값으로 보아 긴 기간 쭉 이어져 왔던 것 같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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