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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쌍사자석등

이 석등은 고달사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하대석에는 쌍사자를 배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간주석에서도 전형적인 양식과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특수형 석등으로 분류되고 있다.

본래는 옥개석이 결실된 상태로 이전되어 있었으나, 2000년 기전매장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고달사지발굴조사에서 수습되어 현재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 내부에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지대석은 방형으로 각 면에는 6괄호형의 안상이 각각 2구씩 조식되었을 뿐이다. 상면에는 방형 받침과 쌍사자가 일석으로 조성된 하대석을 놓았다. 사자는 2마리 모두 판석형의 받침에 붙어서 좌·우에서 앞발을 앞으로 내밀고 웅크리고 앉아 서로 마주 보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가지런하게 표현된 네 발과 단정하게 표현된 갈귀와 꽉 다문 입과 이빨의 표현 등을 보아 동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매우 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때문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쌍사자석등은 모두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는 하대석을 딛고, 앞발로는 상대석을 받치며 힘차게 조성된 것과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사자가 배치된 위치와 더불어 안정감의 확보에 따른 결과라 생각된다. 즉 간주석 전체를 사자로 대치할 경우 상부의 화사석을 받치기 위해서는 사자의 모습에서 앞·뒤발에 힘을 주어야 하는 까닭에 자연스레 힘찬 표현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석등의 경우는 하대석에 배치된 관계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계승할 경우 간주석의 처리가 문제로 대두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 간주석이 놓일 공간의 확보는 물론 전체적으로 석등이 너무 높게 조성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하대석에 놓인 사자의 모습은 자연스레 웅크린 모습으로 변화되어, 등에 간주석을 놓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럴 경우 포효하는 사자의 모습으로 조각되었다면 상면에 놓인 부재 전체가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단정하고 정적인 느낌을 주도록 사자를 조각하고 웅크린 자세로 배치해 쌍사자석등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또 다른 변화를 주어 새로운 양식의 석등을 조성했다. 사자의 등 사이와 뒷면의 공간에는 운문을 가득 양각한 높직한 단을 마련해 간주석이 놓일 수 있는 안정적 면을 확보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볼 때에 간주석은 사자가 받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운문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구현하고 있어 이채롭다.

간주석은 2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운문대 위에 놓인 부재는 일석으로 조성하였는데, 하면을 널찍하게 조성해 안정감을 부여하고, 상면에는 주변에 운문이 조식된 높직한 괴임을 조출해 간주석을 받고 있다. 간주석은 중앙에 돌출된 방형의 부재를 중심으로 상·하면이 대칭을 이루고 있어 9세기에 조성된 고복형 석등의 간주석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하면에 조성된 부재는 사다리꼴의 형상으로 상면을 편평하게 다듬어 부재를 받도록 조성되었다. 네 면에는 운문이 조식되었다. 상면에 놓인 부재는 방형으로 간주석의 상·하면에 놓인 부재보다 넓게 조성해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상면의 부재를 받고 있다. 간주석의 상면에 놓인 부재는 역사다리꼴의 형상으로 네 면에는 보상화문을, 측면에 초화문을 조각하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부등변팔각형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대석은 일석(一石)으로 조성되었는데 부등변팔각형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하면에는 가장 하면에 각형 2단의 받침을 조출한 후 각 면 중앙과 모서리에 각각 1구씩 모두 8판의 복엽앙련을 조식했고, 화문의 사이에는 간엽을 배치했다.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했다. 화사석 역시 부등변팔각형의 형태로 8면 중 넓은 면에는 화창을 개설했다. 아울러 좁게 표현된 면은 안쪽으로 석재의 면을 깎아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옥개석은 화사석과 같이 부등변팔각형의 모습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일반형 석등의 그것과 같은 양식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모서리가 파손되어 원형을 상실했지만, 부분적인 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면에는 각호각형 3단의 받침을 조출했을 뿐, 처마의 하단에는 아무 조식이 없다.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합각선이 뚜렷해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다. 상면에는 복엽 16판의 복련대(覆蓮臺)를 조출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된 쌍사자석등과 고복형 석등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방형과 팔각형의 평면구도를 지니고 있어 고려 나름대로의 석등 양식을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지 쌍사자석등과 회암사지 쌍사자석등은 일단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이 계열의 양식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됨으로써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을 잘 보여주는 조형물이다. 본래 석등의 간주석에 쌍사자를 배치하는 경우는 신라 말기인 9세기에 이르러 건립된 것들로서 법주사 쌍사자석등, 영암사지 석등, 중흥사지 쌍사자석등이 남아 있다. 이 유형의 석등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고달사지에 단 한기만 조성되었고, 조선시대에도 앞서 언급한 것 외에 회암사와 중원 청룡사지 석등의 예에서만 찾을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맥은 신라 말기에 발생되어 고려시대의 고달사지, 조선시대의 회암사지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부분적으로 조형감각이 통일신라의 그것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의 개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있어서 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란 측면에서 주목된다. 뿐만 아니라 쌍사자가 배치된 특수형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을 제외하면 단 3기만 조성되었는데, 이 중 2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경기도의 불교문화가 지닌 특수성의 일단을 명확히 보여주는 예라 생각된다.

고달사지 석등은 사자의 배치 방식에 있어서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획일적인 양식에서 탈피해 웅크리고 앉은 모습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고려 나름대로의 새로운 양식을 창안했다. 이는 앞·뒷발로 힘 있게 화사석을 받치는 자세보다는 웅크리고 앉음으로써 더 안정적인 자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데 착안한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자석등은 사자가 간주석의 역할을 하지만, 고달사지 석등은 별도의 간주석을 조성했기 때문에 설계 당시부터 이에 대한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나아가 통일신라시대의 것은 쌍사자가 마주보는 자세라면 고달사지의 것은 웅크리고 앉아 고개만 살짝 틀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정감 있는 자태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석등의 건립에 쌍사자의 배치라는 아이디어는 통일신라시대에서 빌려왔지만, 고려인의 석조물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예라 생각된다. 이 같은 여러 측면에서 볼 때 고달사지 석등은 신라 양식의 계승적인 면과 더불어 이를 조형물의 특성에 맞게 변화시킨 독특한 예라 생각된다. 아울러 간주석에서 고복형 석등의 양식을 채용해 다시 변화시킨 점 또한 주목된다. 고복형 석등 역시 9세기에 건립된 새로운 양식의 석등이다. 하지만, 이 계열 석등의 간주석에서 확립된 원형의 평면에 상·하대칭의 원칙은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에서 평면의 방형을 바꾸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달사지 쌍사자석등은 9세기에 확립된 쌍사자 및 고복형 석등의 양식을 총체적으로 종합해 고려인 나름대로의 예술성과 감각을 살려 조성한 석등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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