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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 일명귀부

이 귀부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에서 북쪽으로 4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비신과 이수가 남아 있지 않으며, 귀두와 비좌에 파손된 부위가 많다. 귀부의 귀두는 원종대사혜진탑비의 귀부와 동일한 방향을 보고 있으며, 원위치로 추정된다.

지대석과 귀부는 동일석으로 치석되었다. 지대석은 사각형으로 상면에 낮은 1단의 괴임을 두어 귀부를 받치도록 하였다. 귀신은 낮게 올라와 있고 뒷부분에 꼬리가 살짝 나와 있다. 발은 귀신의 사방에 있는데, 짧게 나왔으며 발이 나와 있는 귀신 부위에만 주름문이 표현되었다. 앞발은 전방을 향하고 있으며, 뒷발은 측면을 향하도록 하였다. 발가락은 5지로 형식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귀부의 귀두는 결실된 상태이다. 목줄기 좌우에는 주름문이 반복 표현되었으며, 귀갑대는 일정한 너비로 마련하였다. 귀갑대에는 촘촘하게 주름문이 반복되어 있으며, 귀갑문은 1조의 돋을대를 육각형으로 구획한 후 다시 그 안에 1조의 돋을대를 육각형으로 돌려 표현하였다. 귀갑문의 표현 기법은 바로 옆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비와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귀부의 상부 가운데에는 비좌를 마련하였는데, 비좌의 서쪽 편이 심하게 파손된 상태이다. 비좌가 있는 귀부 주위로는 구름문을 가득 장식하였다. 그리고 비좌는 수직에 가까운 복판 앙련문을 사방으로 돌려 조식하였는데, 연화문은 2중으로 상하에 나란히 배치하였다. 앙련문 상부에는 갑석형 비좌받침을 마련하였다. 비신홈 주위에는 비신괴임이 있고 비신홈의 규모는 114×22cm이다. 따라서 비신은 큰 규모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달사지 귀부는 원종대사혜진탑비에 비하여 소형이다. 그런데 등줄기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도록 한 점이나 비좌 주위에 있는 귀갑에 구름문을 가득 조식한 점 등은 친연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비좌 주변에 표현된 구름문과 앙련문은 고려시대 탑비의 비좌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종대사혜진탑비는 귀부의 전체적인 평면이 사각형을 이루고 있지만 고달사지 귀부는 뒷부분을 반원형으로 하여 타원형에 가까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전체적인 평면은 통일신라시대에는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사각형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한 고달사지 귀부는 마모가 많이 진행되었지만 세부 표현 기법에서 원종대사혜진탑비처럼 역동성과 비사실적인 과장된 표현보다는 사실적이고 섬세한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탑비에서 귀부의 전체적인 규모는 통일신라 말기에는 작아지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대형화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점 등을 감안할 때 고달사지 귀부는 원종대사혜진탑비보다 빠른 시기인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달사는 원감국사 현욱(787~868)과 원종대사 찬유가 입적한 사찰이었다. 두 승려는 국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던 고승이었다. 따라서 석조부도와 탑비가 건립되었으며, 중앙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런데 현재 원종대사혜진탑비는 이수 제액의 명문으로 보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반면에 원종대사 찬유보다 빠른 시기에 입적한 원감국사 현욱의 탑비는 아직까지 그 구체적인 실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원종대사 찬유가 원감국사 현욱의 법손제자였음을 감안할 때 원감국사 현욱의 탑비가 원종대사혜진탑비보다 이른 시기에 입적 사찰인 고달사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달사지 귀부가 원감국사 현욱의 탑비에 활용된 귀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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