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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승탑

기단부·상륜부·탑신부를 모두 갖춘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조승탑으로 3.4m의 높이를 지니고 있다. 건립연대나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려초기 석조승탑의 양식을 대표할 수 있는 걸작으로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4호로 지정되었다.

상륜부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구비하고 있는데, 기단의 외곽에는 여러 장의 장대석으로 구성한 팔각형의 탑구(塔區)를 형성했다. 기단은 수매의 판석으로 짜인 팔각형의 지대석 상면에 2단의 받침을 조출한 후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차례로 놓았다. 일석(一石)으로 조성된 하대석은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단석의 각 면에는 세장한 안상을 2구씩 음각하였다. 각 안상의 중심에는 지선으로부터 올라온 귀꽃을 1구씩 새겼고, 상단에는 갑석형을 묘사하고 있다. 상단석에는 각 변과 모서리에 각 1판씩 복엽 16판의 복련(覆蓮)을 배치하였다. 연판의 끝 중심에는 양쪽에서 모아지는 꽃잎이 예각(銳角)을 이루며 살짝 들려 날렵하고, 복엽의 연꽃과 더불어 중후하고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연판의 간지에는 간엽(間葉)을 조식했는데,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중대석을 받고 있다. 중대석의 상·하단에는 높직한 각형 1단의 갑석형 받침을 팔각으로 돌려서 각각 하대석과 상대석의 부재에 맞도록 하였다. 중대석의 중심부는 원형으로 중앙에 배치된 귀두(龜頭)를 중심으로 네 마리의 용과 운문(雲紋)을 조식했다. 귀두는 굵은 눈썹, 똑바로 뜬 커다란 눈, 이빨을 드러낸 커다란 입 등에서 고려초기의 조형물에 나타나는 강건하고 웅휘한 기풍을 엿볼 수 있다. 머리 이하에서는 U자형의 인갑문이 새겨진 목과 앞으로 살짝 들어 올린 가슴, 5조의 발가락과 발톱이 선명히 새겨진 발이 표현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는 양발을 딛고 가슴을 들어 올리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용두(龍頭)는 중앙에 배치된 화염보주(火焰寶株)를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는 형상을 취하고 있는데, 앞으로 내민 발이 보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네 마리의 용은 모두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크게 조각되었는데, 각 부의 표현이 섬세할 뿐만 아니라 웅장하고 세련된 조각기법을 보이고 있다. 용의 상·하면에는 모두 운문이 조식되어 전체적으로는 화염보주를 받치며 구름을 사이로 하늘을 나는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중대석을 원형으로 조성하고 귀두와 용을 조각하는 것은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 승탑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서로 조성 시기가 다른 승탑에서 공통적인 양식이 검출됨은 앞 시대에서 확립된 기본적인 양식이 후대에 직접 영향을 주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일례라 하겠다. 팔각형으로 조성된 상대석의 하면에는 깊숙이 높직한 1단의 받침을 각출하였다. 844년에 조성된 염거화상탑 이래 건립된 승탑의 대부분은 상대석 하면의 받침이 중대석 보다 밖으로 돌출되어 넓게 조성되고 있음에 비해 이 승탑에서는 중대석 안쪽 깊숙한 곳에 받침을 조출하여 밖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특이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측면에는 큼직한 복엽 8판의 앙련(仰蓮)을 조식했는데, 넓고 부드럽게 조성된 꽃잎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다. 연화문의 사이에는 간엽을 조식했고, 갑석형을 돌린 상면에는 각호각형 3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석을 받치고 있다.

탑신석의 각 면 모퉁이에는 우주를 모각하고 문비형과 사천왕상, 영창(映窓) 등을 조각하였다. 문비형은 비교적 굵게 묘사된 선으로 장방형의 외곽을 구성한 후 내부에 자물통을 양각하였는데, 전체적으로 탑신에 비해 작게 조성되어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 영창은 장방형의 액 내에 세로 방향의 창살을 묘사했는데, 이 역시 탑신에 비해 작게 표현되어 부조화를 보이고 있다. 사천왕상은 문비형 좌·우에 각각 1구씩 조각했다. 각 상(像)은 원형의 두광을 구비하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형상으로 발아래에는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갑옷에 표현된 옷주름은 섬세하게 표현했는데, 허리부근에서 살짝 틀어 전체적으로는 몸이 옆으로 약간 튼 자세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 역시 평면 8각으로 비교적 두껍게 조성했다. 아랫면에는 깊숙이 낮고 널찍한 받침을 조출하여 탑신석 상단부와 맞게 하였고, 각 면에는 비천상을 조각했다. 비천상은 상호(相好)와 신체가 풍만하게 조성되어 그리 날렵한 인상을 주지는 못하지만, 유려하게 날리는 천의자락에서 역동적인 자태를 느낄 수 있다.

낙수면은 석탑 옥개석형으로 조성되어 신라 석조승탑과는 달리 기왓골 등의 표현이 없으며 낙수면의 합각선이 뚜렷하고 여덟 귀퉁이 전각에는 큼직한 귀꽃이 조각되어 있다. 이 귀꽃은 다른 승탑의 그것보다 크고 높게 조성되었지만, 표면에 가해진 조각은 섬약해 보인다.

옥개석의 정상에는 복련대(覆蓮臺)를 돌리고 상륜부를 받치도록 하였는데, 현재는 복발과 보개석만 남아있다. 복발의 중앙에는 2조의 선문(線紋)을 돌렸고, 보개의 하면에는 복엽 8판의 앙련을 조각했는데, 전체적인 형상은 옥개석과 같은 모습이다. 보개석의 상면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관통되어 있다. 승탑의 뒤편 산자락에는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장대석으로 축조한 담장이 구축되어 있어 조성 당시부터 이에 대한 존경과 보존에 많은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승탑은 신라시대에 정착된 팔각원당형 승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와 세련된 조각수법에서 장중한 작풍을 보이고 있다. 나아가 9세기 말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시도된 중대석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주목된다. 승탑에 딸린 탑비(塔碑)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지만, 각 부의 조각 수법과 양식 등으로 보아 같은 사역에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 968년 입적, 광종 9)의 묘탑(墓塔)인 혜진탑(慧眞塔) 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승탑은 사역에서 떨어진 서쪽 산 중턱에 위치한 까닭에 1950년대까지는 지대석은 물론 석축이 모두 매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상황에서도 마을에서는 매년 8월이면 금줄을 매고 제의를 지냈다고 한다. 1950년대에 도굴범들에 의해 옥개석이 일부가 파손되어 이를 바로 잡고, 토사의 유출로 인해 매몰되었던 지대석을 노출시키고, 석축을 정비하던 중 건립 당시의 배면(背面) 석축과 더불어 배례석 및 8각형의 석재가 확인된 바 있다. 1979년에 이르러 옥개석에 대한 접착공사를 진행한 후 보존되다가 2002년 봄에 다시 도굴범에 의해 옥개석이 들려지고, 귀꽃의 일부와 상륜부재가 파손되어 같은 해 8월에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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