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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조사

발굴조사1)

약 12,000여 평에 달하는 웅장한 사역규모와 사역 내에 남아있는 다수의 국보급 문화재는 고달사지의 높은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관련 학계에서도 일찍부터 고달사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높은 관심을 보여, 1993년 7월 23일 사적 제382호로 지정(지정면적 41,035㎡)하였다.

그러나 사역 내에 민가와 여타 건물이 들어서 마을을 형성하고, 일부는 경작지로 변도됨에 따라 절터의 파괴가 진행되어 갔다. 이에 경기도와 여주군은 사역의 정비와 보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98년에 고달사지의 정비 및 보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역 전체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를 경기도박물관에 의뢰하였다.

이후 1차 시굴 및 발굴조사 결과 유적 범위가 당시 주변의 민가지역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여주군에서는 주변 민가를 매입, 철거한 후 정밀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이에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은 1999년 9월부터 2000년 6월까지 공동으로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10세기말 이후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15여동 건물지를 확인함에 따라 가람 배치에 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이러한 1·2차 발굴조사의 성과를 당시 정치상황의 변화와 연결하여 고달사지의 가람 변화 및 고고미술사적 자료를 연대기적으로 고찰하여 조사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라하대는 현욱·심희·찬유 등의 유학 전 활동기로 이때의 고달사는 신라하대의 사회적 혼란기에서 대대적인 경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 사역은 석불대좌가 있는 1건물지와 그에 연결되는 1-1건물지가 중심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1건물지 전면에는 추정 석등지와 추정 탑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향하는 법당(1건물지)을 중심으로 전면의 축선상에 탑과 석등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법당과 연결되는 승방(1-1건물지)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유물은 보상화문·6엽단판연화문·8엽단판연화문 등의 수막새기와가 특징이다.

고려전기는 찬유가 활동하던 때로, 광종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을 받으면서 사세가 급성장하여 부동선원으로 자리 잡은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전엽, 중엽, 후엽으로 세분할 수 있다.

우선 전엽은 찬유의 생존시기로 국가적인 지원으로 사세가 날로 번창하던 시기이다. 이시기에 1건물지를 중심으로 하는 2건물지의 중단구역과 가-2·가-3 건물지를 중심으로 하는 하단건물지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엽은 찬유 사후의 시기부터 천태종에 흡수되기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이때에 원종대사혜진탑의 비각이 세워지고 이 비각을 중심으로 하는 상단구역이 조성되었다. 즉 8건물지, 11건물지, 3건물지 등이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엽은 고달사가 법안종에서 천태종으로 흡수되는 시점이다. 이 시기에도 고달사는 기존의 사역을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고려전기의 유물은 12엽세판연화문·16엽세판연화문으로 대표되는 수막새기와와 강진에서 번조된 상품자기들이 대표적이다. 고달사 출토유물은 이 시기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의 유물은 제5건물지를 제외한 전체지역에서 고르게 출토된다.

고려중기는 무신집권기로 고려사회가 동요하기 시작하고, 불교계에서는 행동불교인 선종이 무신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이다. 이즈음 고달사는 국가적인 지원이 끊기면서 급속하게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여주를 본향으로 하는 이규보의 글에 고달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해당되는 상품청자가 보이지 않는 사실과 함께 해당시기 유물의 출토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도 위의 추측을 뒷받침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시기에 귀목문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를 지닌 막새기와가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고려후기·조선전기는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달사의 사역은 매우 축소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건물지를 중심으로 해당시기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사실로 미루어 중단구역의 북편을 중심으로 사역의 명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불교에 대한 억불정책이 자행되면서, 고달사의 사세도 극도로 피폐되었을 것이며, 결국 16세기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굳건히 자리잡는 시점을 기하여 고달사는 폐사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분청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자기와 범어문·운룡문으로 대표되는 조선기와가 특징적이다.

3차 발굴조사는 2000년 1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조사는 2차 조사에서 조사하지 않았던 가-2건물지의 동쪽 부분을 확인함으로써 가-2건물지와 고달사지쌍사자석등 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영역의 건물배치를 확인하는 것에 비중을 두어 진행하였다. 또한 조사지역 내에 유구의 유무를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추후 해당 지역에서의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조사였다. 3차 발굴조사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3차 조사를 통하여 가-2건물지와 가-3건물지 동쪽 기단이 노출되어 각 건물지의 규모가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을 통하여 가-2건물지와 가-3건물지의 사용시기 및 상호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둘째, 가-2건물지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으며, 건물지 정면의 중심 축선상에 고달사지쌍사자석등지가 위치하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가-2건물지와 석등지의 배치관계(1금당-1석등)가 명확해졌다.

셋째, 가-2건물지 동쪽 지역에서 건물지가 추가로 확인되어 가-2건물지를 중심으로 하는 영역의 건물배치에 대한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건물지는 장축 33m 이상의 남북으로 긴 형태로 노출되었으며, 주변에 크고 작은 초석이 어느 정도 정형성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다.

출토유물중 우선 기와류로는 수키와와 암기와 외에 수막새, 암막새 등의 막새기와와 “高達寺”명 기와, 귀면와, 치미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회청색 혹은 회흑색의 경질이 대부분이지만 좀더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연질의 회색토기편도 몇 점 발견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이화문토기편도 1점 수습되었다.

자기류는 청자, 분청, 백자가 고루 출토되었는데, 백자류는 표토층 및 상부퇴적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청자와 분청은 상대적으로 유구가 노출되는 면에서 많이 출토되어 시기적 차이를 나타낸다.

금속유물은 철제 꺾쇠, 철부, 철도자편, 철촉, 철제, 고리 등이 있으며, 청동제 방울도 1점 수습되었다. 이외에도 석제 벼루편 2점이 출토되었다.

4차 발굴조사는 2002년 8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조사 결과 건물지, 축대, 담장지, 석조 등이 발굴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을 토대로 조사성과와 의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에 부합되는 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즉 1·2차 발굴조사 결과 15여동의 건물들이 모두 10세기말 이후의 건물지들로 조사됨에 따라 문헌에서 보이는 고달사지의 초창기(8세기)와 사세확장기(9~10세기)대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4차 조사지역에서 8세기 이후부터 12세기에 걸쳐 유구 및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초창가람의 권역이 현 조사구역 내에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가람 배치 변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둘째, 건물지간 위치 관계 및 동선 처리, 석조물은 각 영역의 성격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우선 축대와 가-1담장석렬, 계단지로 구성된 영역은 사찰 내외와 사찰 내 각 영역간의 동선의 흐름을 조절해 주는 전이공간으로 작용한다. 다음 가-1·2·3건물지 및 이로 둘러싸인 마당은 조용한 예배 공간 및 수행 공간이 되도록 계획한 것으로 판단되며, 가-4건물지는 수조와 함께 그 동쪽 영역으로 생활공간인 요사채 영역과 배수시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조사구역의 동쪽 전면에 대형건물지가 노출됨에 따라 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역이 구성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추후 확장된 사역과 가람 배치에 대한 조사 및 해석이 요구된다.

출토유물은 우선 기와류로는 연화문·귀목문 수막새와 당초문·인동당초문·초엽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명문와로는 “高達寺[艽]”, “丁巳生”, “祖十口七 太戶子十口”, “寺天”, “卍”자가 적힌 평기와가 출토되었다. 전류로는 건물지에 따라 방형전, 장방형전, 제형전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가-1건물지안에서 일부 회백색 연질토기편이 출토되었을 뿐, 조사지역 대부분 회청색 또는 회흑색의 고려시대 경질토기편이 차지하고 있다. 그 기종은 호, 병류가 주종을 이룬다.

자기류는 청자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후대 민가 유구가 포함된 층에서 백자편이 주류를 이루었다. 청자는 순청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기종은 완, 잔, 접시, 대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철제유물은 대부분 철정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문고리, 철겸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가-2건물지 정면 기단열 밖에서 철마 2점이 나왔다. 청동제 유물로는 청동수저와 청동편들이 가-1건물지의 안팎에서 출토되었다. 동전은 2점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가-1건물지 남쪽 기단석렬 밖에서 출토된 ‘원풍통보(元豊通寶)’로 원풍은 송나라 신종대(神宗代) 연호로 1078년~1085년까지 8년간이다. 다른 하나는 ‘상평통보(常平通寶)’로 가-1축대의 남쪽에서 출토되었다.

기타유물로는 석제 벼루편 2점이 가-3건물지 안팎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화엽문의 귀꽃이 쌍사자석등 지대석에서 동쪽으로 약3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는 쌍사자석등 옥개석의 귀꽃으로 추정된다.

5차 발굴조사는 2004년 3월부터 11월까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동쪽 시내에 인접하여 사역의 경계를 보여주는 석렬이 노출되었으며, 그 앞(북)쪽에는 요사채로 추정되는 건물지 6동이 노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구들과 마루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보완 조사지역에서 탑지 1기가 추가로 발굴되어, 가람배치의 변화를 읽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출토유물은 각종 막새류, “高達寺”명 명문기와, 장방형전과 제형전 등의 전류가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대부분 회청색 또는 회흑색의 고려시대 경질토기편이 차지하고 있으며, 기종은 호, 병류가 주종을 이룬다. 자기류 중에는 고려청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기종은 완, 접시, 대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금속유물에는 특히 청동향로와 청동합 등 청동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사자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향로다리는 몸체편에서 분리되어 결실된 상태로 3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가-6 건물지 밖에서는 ‘희령원보(熙寧元寶)’ 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고려 문종대(1046~1083년 재위)에 건물이 사용되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이상 고달사지에 대해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총 5차에 걸쳐 발굴조사된 조사성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고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5년 현재 6차발굴이 진행중에 있다. 1980년대부터 2004년까지 고달사지에 대한 연도별 사업 및 발굴조사 성과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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