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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창건과 연혁

□ 소재지 :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 시 대 : 통일신라
□ 지정사항 :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는 해발 400~500m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의 서북쪽 고달산(혜목산, 현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이다.

고달사의 정확한 창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고달사는 곧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고달사지에 관한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원감화상 현욱(園監和尙 玄昱, 787~868년)이 도당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였던 9세기 무렵 이미 사찰로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감대사는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장경회휘(章敬懷暉)로 이어지는 법맥으로 868년(경문왕 8)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훗날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4~923년)는 9세의 나이로 혜목산에서 출가(863년)하여 원감화상의 가르침을 받고, 열아홉 살에 구족계(873년)를 받았다. 이후 산천을 두루 순례하며 구도하다가 신라 말의 전란을 피해 창원으로 내려온 뒤 그곳에 봉림사를 세우고 봉림산문을 열었다. 진경대사가 고달사를 떠난 뒤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하기까지의 약 50년간 고달사에 대한 기록은 자취를 감추다가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년)가 중국에서 돌아온 10세기 초에 다시 나타난다. 원종대사 찬유는 고려초에 국사의 예우를 받으며 활약한 승려로서, 고려 광종대의 불교 교단의 정비와 사상의 통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법안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고달사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원종대사 사후에도 광종이 특별히 명을 내리어 도봉원·희양원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선원(三不動禪院)으로 삼고, 977년(고려 경종 2)에 원종대사혜진탑을 건립하는 등 고달사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이 시기에 크게 사세를 떨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 입적 후 법통은 삼중대사 흔홍이 이어받고 이 밖에 중대사 동광, 행근 등 500여 명의 문도가 있을 정도로 융성하였으며,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고, 1101년(고려 목종 4) 고달, 영암, 거돈, 지곡 등 5대 사원의 문도 및 제자 1,300여 명이 천태종에 흡수될 때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말까지 고달사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1530년(중종 9)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로소 등장한다.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799년(정조 23)에 씌어진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과 보물 제6·7·8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탑비, 원종대사탑, 고달사지 석조대좌 등이 남아 있는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한편 고달사지 내에 있던 원종대사의 비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원래의 위치에 있지 않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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