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의 비상 여주시 여주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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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평면 팔각형의 구도를 지닌 석등으로 나옹스님의 사리탑 앞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형의 높직한 지대석 상면에 각각 1석으로 조성한 기단부·화사석·옥개석·상륜부를 순차적으로 놓아 모두 5매의 석재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기단부가 다른 석등에 비해 낮게 조성되어 마치 팔각원당형 석조부도를 보는 듯하다. 지대석은 평면 8각의 형태로 아무런 조식이 없다. 1석으로 조성된 기단부는 하대·중대·상대의 3부분으로 구성하였는데, 전체적으로 낮게 조성되어 부도 및 부상의 대좌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하대석에는 복엽 16판의 복련(覆蓮)이 조식되었고, 잘록한 간주석에는 각 모서리에 연주문(蓮珠紋)으로 구획을 나눈 후 내면에 아(亞)자형의 안상을 배치하고 있다. 상대석에는 복엽 16판의 앙련을 조식했는데, 상면에는 아무 받침 없이 편평하게 다듬어 화사석을 놓았다. 팔각형의 평면을 지닌 일반형 석등의 화사석은 다른 부재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등에서는 납석제를 사용해 높게 조성되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화창은 각 면에 1개씩 모두 8개를 개설했는데, 사라센 계통의 완만한 곡선의 화두창(花頭窓) 양식을 따르고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율동감 넘치는 반룡문(蟠龍紋)을 섬세하게 양각했고, 상면에는 평창과 창방을 조각해 목조건축의 의도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창방과 화창 상면의 공간에는 하강하는 형태의 비천을 고부조(高浮彫)로 양각했다. 화사석에 다른 석등과는 달리 목조건축의 표현과 더불어 반용과 비천을 배치하고 있음은 납석을 재료로 선택한 까닭에 섬세한 조각이 쉬웠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팔각형의 옥개석은 비교적 낮게 조성되었는데, 우동이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반원형을 이루는 처마는 높직한데, 전각(轉角)의 반전이 예리해 둔중한 감을 면하고 있다. 하면에는 1단의 옥개받침과 낙수 홈이 마련되어 있다. 정상에는 옥개석과 1석으로 조성한 복발(覆鉢) 위에 연봉형의 보주(寶珠)를 놓아 상륜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 석등은 나옹화상의 부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 가람배치상의 석등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부도 앞에 건립되는 가평 현등사 부도 앞 석등, 회암사 지공·나옹·무학대사 부도 앞 석등, 중원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 앞 석등의 조형(祖型)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무덤에 등장하는 장명등의 조형을 이루는 고려말기의 대표적인 석등이라 하겠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나옹화상의 부도와 탑비가 건립되던 1379년(고려 우왕 5)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지닌 양식에서 종래의 전형적인 석등에서 변화되는 모습으로는 기단부의 축소, 화사석의 사용된 석재 및 양식 그리고 성격의 변화를 들 수 있다.

먼저 기단부의 변화로는 종래의 전형적인 석등에서는 간주석을 높게 조성했음에 비해 이 석등에서는 전체적으로 낮게 조성하고 상대석과 하대석을 넓게 조성해 마치 부도의 기단을 연상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복형 석등을 제외한 평면 팔각의 석등에서는 간주석에 아무 조식이 없는 반면, 이에서는 연주문과 안상을 조각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석등 간주석에서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부도 및 불상대좌와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화사석에 있어 기존의 석등에서는 기단부와 같은 재질의 석재를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이에서는 납석을 사용하고 있어 이채롭다. 이는 석등의 조성 시 이미 화사석에 많은 장엄을 가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조치라 생각되는데, 실제로 화사석에 베풀어진 많은 조각을 보아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하기보다는 비교적 무른 납석을 채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석등의 화사석에 표현된 조식은 사천왕상이 전부인데 반해 이에서는 우주(隅柱), 반룡(蟠龍), 비천상(飛天像)을 비롯해 목조건축의 요소인 창방과 평방까지 표현하고 있어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유일한 예를 보이고 있다. 아울러 화창에 구현된 사라센 양식은 당시 서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신륵사가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여건에서 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남한강은 서해로 연결되어 항시 수로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수입하기 쉬운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여주는 당시 수도인 개성과 가깝다는 점과 더불어 남한강변에 있어 인근 지역에서와 같이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기 쉬운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륵사 석등에 서역문화의 영향이 나타남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로 이는 당시 여주가 지녔던 새로운 문화수용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부도의 전면에 배치됨으로써 불교적인 성격의 석등이 장명등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조성함과 동시에 이 같은 유형의 한 규범을 완성했다는데 성격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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