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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 경내의 동남편 강가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9.4m의 규모로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이다.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7단으로 구축했는데, 3·5·6·7단에서 체감을 이루며 층단형을 이루고 있다. 이 중 2층과 4층의 석재는 다른 부재보다 높게 조성되어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2층 기단의 형상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기단 전체를 화강암으로 축조한 경우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용례라 생각된다. 기단의 상면에는 여러 장의 화강암으로 구축한 낮은 1단의 탑신받침이 놓여있다.

탑신부는 모두 6층으로 마지막 층만 높이와 너비가 축소되었을 뿐 나머지 층에서는 일정한 체감비를 볼 수 없어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결여된 채 고준(高峻)한 감만을 주고 있다. 아울러 탑신부를 구성하는 벽돌은 연주문이 시문된 반원 내에 당초문을 새긴 것과 무문(無紋)의 2종류가 불규칙하게 구축되어 있는데, 벽돌의 조립에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탑과 같이 촘촘히 놓인 것이 아니라 벽돌 사이를 벌리고 그 사이에 백토(白土)를 발랐다. 옥개석의 받침은 3층까지는 2단이며, 나머지 층은 1단씩 두었다. 낙수면 역시 1층은 4단임에 비해 나머지 층은 모두 2단씩 되어 있어 각 층의 경계선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다. 상륜부에는 벽돌로 조성한 노반(露盤) 상면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보주(寶珠)가 놓여있다.

이 전탑에 대해서는 금서룡(今西龍)이 고려 말의 건립설을 제기한 이래 고유섭도 이를 지지하고 있는데, 인근에 위치한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로 보아 1726년(영조 2)에 수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비문의 내용 중 이 전탑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옛부터 벽돌탑이 있어 그 산정(山頂)을 누를 듯한 데 이를 나옹탑이라 전해지고 있다. (중략) 허물어진 때문에 절의 스님이신 덕륜(德輪)과 탁련(琢璉)이 모든 신도들이 모금을 하여서 새로 보수한 기둥 만도 백여 개가 되었지만, 오직 탑만은 보수하지 못했다.” (중략) 스님 영순(英淳)과 법밀 등이 발원하여 재물을 모아 금년 봄에 수리하기 시작하여 탑을 헐어 내려가다 밑바닥에 이르러 간직해 두었던 사리 5개를 얻었고 (마멸) 말하기를 부처님 사리도 문수(文殊)께서 보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보제(普濟)는 본사(本寺)에서 입적하시었고, 다비식도 이 언덕에서 거행하였으니 이 사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멸) 상고해 보면 거기에 이르기를 사리를 얻은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으니, 각신(覺信)의 무리가 아니었더라면 어찌 북쪽 언덕에 정골사리를 봉안하였을 것이며 다시 그 나머지를 화장한 장소에 탑을 세워 간직하고 석종을 만들어 보관할 수 있었을 것인가? (마멸) 마침내 4월 8일에 맨 먼저 아래 석대(石臺)를 수리하고 다시 경감(瓊龕)을 안치하고 이어서 벽돌을 쌓아올려서 (마멸) 그 또한 성실하고 전력을 다한 것이다. (중략) 옛사람이 전한대로 모방하고 전후에 보수한 수고로움도 다 기록하기 어렵다. 영릉을 옮기고 이 절을 영릉 원찰로 삼고는 조정에서 보은(報恩)한다는 의미로 보은사(報恩寺)라는 현판을 내리셨다고 탑지(塔誌)에 기록되어 있다. 성화(成化)·만력(萬曆)간에도 관에서 재차 수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기록은 다층전탑의 수리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나옹탑이라 불렸다는 기록은 전탑의 건립이 나옹화상과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나옹화상은 1376년(고려 우왕 2) 4월에 회암사에서 문수회(文殊會)를 열었는데, 이로 인해 경상도 밀양군(密城郡)으로 추방되어 이송되던 중 신륵사에 이르러 5월 15일에 입적하게 된다. 따라서 나옹이 신륵사에 머문 기간은 길어야 한 달에 불과한 극히 짧은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기간 내에 전탑을 건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오히려 나옹의 입적 후 일어났던 신비로운 이적(異蹟)은 신륵사의 사세(寺勢)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전탑이 건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다층 전탑은 신륵사와 나옹과의 관계를 보아 1376년을 건립 하한으로 설정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신륵사의 연혁을 기록한 탑지(塔誌)가 봉안되어 있었다.

셋째, 사리는 밑바닥에서 수습했다는 기록을 보아 기단하부에 사리를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1726년(조선 영조 2)의 수리시 경감(瓊龕)을 안치하고 다시 벽돌을 쌓아올렸다는 기록을 보아 이때에도 사리는 기단부에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제일 먼저 석대(石臺)를 수리했다는 기록을 보아 1726년 당시까지도 기단부의 모습은 현재와 같이 화강암으로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성화·만력 연간에도 관의 주도로 수리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이 전탑은 건립 이래 성화 연간(1465~1487), 만력 연간(1573~1620)에 이어 1726년(영조 2)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전탑의 명칭은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신륵사 다층전탑이 아니라 「신륵사 동대탑(神勒寺 東臺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현재는 6층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건립당시의 모습이 변화된 까닭에 층수가 불분명하여 다층전탑이라 불리고 있다. 이에 대해 우현 고유섭은 “7층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6층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매우 애매한 자태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서 제목은 「여주 신륵사 오층전탑(麗州 神勒寺 五層塼塔)」으로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 전탑은 본래 7층으로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탑파는 신라시대 모두 홀수의 층수를 이루고 있고, 고려 말에 건립된 안양사의 전탑 역시 칠층으로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6층의 모습에서 부재(部材)를 체감해 층수를 조절해 볼 때 7층으로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한강변에 인접한 암반 위에 건립되어 있어 전통적인 가람배치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고유섭은 석탑의 건립 요인을

“첫째, 가람배치의 규약상 필수적으로 건립된 것, 둘째, 불체(佛體)와 동등가치의 것으로 취급되어 결연추복(結緣追福)을 위하여 일반 승려의 손으로 인하여 건립된 것, 셋째, 고덕(高德)을 표양(表揚)하기 위하여 묘표(墓標)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라고 분류하고 있다.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립되던 불가의 중요한 상징물이었다. 따라서 불교도에 있어서는 신앙의 대상으로 건립 초기에서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탑의 건립에는 반드시 불교와 연관이 없다 하더라도 건립되는 양상을 볼 수 있는데, 신라 석탑에 있어서는 9세기에 이르러 이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왕실 혹은 개인의 번영을 기원하는 목적에서 건립하는 원탑(願塔)과 풍수지리설에 의해 건립된 예를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9세기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의 건립을 시발로 경주 남산리 동삼층석탑,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경주 남산 용장사 계폐탑의 석괴형기단(石塊形基壇)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석탑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안동 막곡동 삼층석탑, 안동 니천동 삼층석탑,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 홍천 양덕원 삼층석탑, 영암 월출산마애불 전방 삼층석탑 및 용암사지 삼층석탑 등 상당수가 건립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석탑의 건립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팽배했던 산천비보의 사상에 의해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통적인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즉 사찰의 동쪽 남한강변에 위치한 동대(東臺)에 건립되어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면 남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다. 한편 강에서 바라 볼 때 사찰은 가려져도 전탑만은 시야에 들어오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이 전탑이 지닌 입지조건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 풍수사상에 의해 건립된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에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신륵사가 위치한 남한강은 삼국시대 이래 충주와 연결되는 주요한 교통로의 하나였고, 이후 경상도 북부와 충청북도 지역의 산물과 세조미의 수송을 전담했던 주요한 수운이었다. 때문에 이 강을 통해 많은 배가 드나들었고, 이들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대상 역시 강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생각은 이 지역에 전해오는 마암(馬巖)의 전설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는데, 인당대사(仁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제압하였다 하여 절의 이름을 신륵사(神勒寺)라 했다.”

여기서 용마의 출현은 바로 강물의 범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리해볼 때 신륵사의 주변을 흐르는 남한강의 물줄기는 분명 인근 주민과 뱃길의 안전에 많은 위험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뱃사공과 인근 주민은 이 탑을 바라보면서 강물의 평안함과 뱃길의 안전운행을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륵사 다층전탑의 건립에는 당시에 성행했던 산천비보사상을 기반으로 불력에 의해 남한강을 오르내리는 뱃길의 안전운행과 강물의 평안함을 기원하고자 하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더불어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이란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는 석탑 발생기로부터 전탑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실물로 전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부터이다.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전탑의 대부분은 경상북도 선산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집중되고 있음에 비해 고려시대에 이르러 경기도 여주에 건립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지방에서는 그 예를 볼 수 없는 전탑이 앞서 언급했던 안양사 전탑과 더불어 2기가 건립되고 있고, 이들은 모두 문양전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신륵사 전탑에 문양전이 사용되었음은 이미 밝힌 바대로이고 안양사의 전탑에 대해서는 고유섭에 의해 그 편린이 소개된 바 있다.

“현재 총독부박물관에 그 탑에서 붕괴된 전편(塼片)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신라탑전(新羅塔塼)의 일양식(一樣式)을 모(模)하여 불상을 부조(浮彫)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안양사 전탑 부재에는 불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처럼 벽돌에 탑·상을 부조하여 전탑의 재료로 사용하는 경우는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으로 그 예가 흔치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신륵사의 다층전탑은 신라시대 이래 유문전(有紋塼)을 사용해 전탑을 건립하던 전통이 유지되고 있어 당시 신륵사의 사격(寺格)을 보여주는 한 예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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