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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평면 방형의 석탑이다. 따라서 외형적인 면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확립된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층수가 불분명한 관계로 다층 석탑이라 불리고 있다. 한편, 현존하는 석탑의 절대다수가 화강암을 사용하고 있음에 비해, 백대리석(白大理石)을 주성재료로 사용한 점이 기존의 석탑과 다르다.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기까지의 각 층 부재는 각각 일석(一石)으로 조립되었는데, 이는 석재가 구하기 어려운 백색 대리석인데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방형의 지대석 상면에 2층 기단을 놓았다. 하층기단의 하대석에는 단엽(單葉) 40판의 복련(覆蓮)이 조식되었고, 중대석의 각 모서리에는 화문(花紋)으로 장식하였는데, 각 면에는 파도문을 조식하였다. 갑석(甲石)의 상·하면에는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을 조식하였고, 중간에는 넓은 돌대(突帶)를 형성하고 있다. 상층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화형(花形)과 연주문(連珠紋)으로 장식한 우주(隅柱)를 모각한 후, 각 면에는 생동감이 넘치는 운룡문(雲龍紋)을 조각하였다. 특히 구름무늬의 유려함과 용의 얼굴과 발가락과 더불어 몸체의 비늘에서 주는 사실적인 감각은 마치 승천하는 용이라 생각될 만큼 활기차게 조각하였다. 이처럼 상층기단 면석에 문양을 조식한 경우는 신라시대 이래 건립된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석탑에서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식하고 있음에 비해, 이 석탑에서는 용과 운문(雲紋)을 가득히 조각해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9세기에 건립된 석불의 예로는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사나불좌상(863년)이 있고, 부도의 경우는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 부도(886년)를 필두로 고려시대에 건립된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승탑 및 고달사 원종대사탑(977년), 경북대학교 소장 석조 부도와 흥법사 진공대사탑(940년)이 있어 앞 시대의 양식이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지에 있는 무학대사부도(1407년)에서 탑신부를 원구형으로 조성한 후 전면(全面)에 구름과 용을 가득 조각한 예를 볼 수 있어 비록 시대를 달리하는 석조물이지만, 양식상의 친연성을 엿볼 수 있다. 갑석의 하면에는 앙련(仰蓮)이 조식되었고, 상면은 편평하게 처리하여 탑신을 받고 있다.

탑신석은 현재 8층까지 남아있는데 매층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평박하고, 옥개받침이 낮게 조출되었으며, 상면에는 각형 1단의 탑신 괴임대가 마련되어 있다.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 전각(轉角)에 이르러 반전(反轉)을 보이고 있는데, 각 층의 체감율이 완만하다. 찰주가 관통된 8층 옥개석의 상면에 소형의 탑신석이 있는 점으로 보아 본래는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종 영릉(英陵)의 자복사(資福寺)로서 1472년(성종 3)에 중흥한 사찰인 점과 1467년(세조 13)에 낙성한 원각사지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과 같은 석질(石質)인 점을 고려 할 때 대략 늦어도 1472년에는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은 이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13기가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 지역에는 다층석탑 외에도 회룡사 오층석탑, 원각사지 십층석탑, 용주사 천보루 앞 오층석탑, 묘적사 팔각다층석탑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 중 신륵사 다층석탑의 기단에 새겨진 운룡문(雲龍紋)은 당대의 석탑과 문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석탑의 기단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을 비롯한 비천상·안상·사자상 등 불교와 연관된 조각이 등장하는 것이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이다. 그런데 이 석탑에서는 이 같은 전통에서 벗어나 구름과 용이라는 조식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석비에서 귀부와 이수에서 등장했던 것으로 석탑에서 채용됨은 특수한 일례라 생각된다. 특히 운용문은 조각기법에 있어 얼굴과 비늘 그리고 발톱 등의 묘사에 있어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동감 있는 표현은 구름무늬와 잘 조화를 이루어 뛰어난 작례(作例)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장이었음을 볼 때, 신륵사가 지녔던 사격(寺格)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신륵사는 나옹화상의 부도와 대장경을 봉안했다는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藏閣記)」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 영릉(英陵)의 원찰로 확정되어 1472년(성종 3) 2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중수공사에서 200칸의 건물이 완공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신륵사의 사세(寺勢)는 이때가 최고 전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1472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운용문을 비롯한 여러 양식은 영릉의 원찰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았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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