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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윤

여주군 대신면 가산리 571번지에서 능성(綾城) 구씨(具氏) 27세손 구원회(具元會)와 이정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3년 경성 양정고등학교, 1933년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 법대 전신)를 졸업하고, 1934년 경기도청 지방과, 개풍군(현 개성), 안성군에서 근무했다. 해방을 맞아 치안대장 및 보건계장으로 근무하였다. 미국 방송을 들으며 새벽마다 영어를 독학해, 미군정의 영어 통역을 도맡았다. 이후 평택군청 산업과장을 거쳐 여주군 산업과장으로 근무하였다. 6·25전쟁 때 양곡 창고 문제로 고생을 치르기도 하고, 음성에서 포로로 옥고를 치렀다.

서울 수복 후 여주군 내무과장으로 발령받아 경찰서장의 직무도 대행하면서 민생치안에 힘썼으며, 여광원 원장 박운환과 더불어 전쟁고아 지원사업에 최선을 다했다. 또 김포군 내무과장 재직시에는 영어 통역의 힘을 빌려 미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전란으로 불탄 김포군청을 새로 지었다. 이어서 안성군 내무과장, 경기도청 산업국 양정과 양정계장을 역임하다 김포군수를 거쳐 1959년 10월 20일부터 1960년 5월 22일까지 여주군수로 근무했다. 당시는 전쟁으로 인한 전후복구 공사가 급선무였고 전쟁고아, 상이용사, 미망인 등으로 사회안정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사회안정과 기간산업으로서의 도로개설, 교량가설, 농업진흥의 군정에 몰두했다. 1960년 11월 23일 고양군수로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공자 탄신 2522년에 향교 전교로 선임되었다. 5·16 군사정변으로 재건국민운동 여주지부장으로 위임되어 군정자문위원으로 위촉, 국민정신운동 및 근대화 과정의 일익을 담당하는 데 남은 역량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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