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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충북 청주 산외일면 세교리 출신으로 봉수(奉洙), 봉서(鳳瑞), 봉용(奉用), 봉룡(奉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구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동년 8월(음)에 의병장 김규환(金奎煥)의진에 가담하여 일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의 명칭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오근장(梧根場) 부근에서 일 헌병대위 도기선치(島崎善治)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이후 전의·목천·평택·여주·횡성·문경 등지에서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1909년 음력 8월에는 문대장(文大將)이라고도 불리던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보은 속리산 등에서 수시로 적을 깨칠 계획을 논의하였으며, 계속해서 일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부득이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인 서울 마포로 피신하였으나 일 헌병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성공소원에 공소하고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에 즈음하여 홍명희(경술국치로 순절한 홍범식의 장남),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무장터(우시장) 입구 마차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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