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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무

여주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 강두영·원필희·이원기·김학수 등과 함께 북내면 당우리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 당시 여주지역은 전국적으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호응하지 않아, 서울사람으로부터 무시당함에 분개한 이원기 등이 여주 장날인 4월 5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4월 1일부터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하여 격문과 경고장,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3일 이웃 동리인 현암리 주민 5~6명이 와서 북내면장인 조석영이 일제에 잡혀갔으니 구하러 가자는 말을 듣고 북내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장이 석방된 후였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강두영·강만길·최명용 등과 원래 계획을 변경하여 이날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그는 장암리·덕산리·외룡리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에 당우리 공북학교에 8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오학리까지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혐의로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0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2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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