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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여주 북내면 교항동 출신으로 일찍이 학문이 높아 그 이름이 원근에 알려진 유학자였다. 인영(寅榮)이라고도 하였으며 후에 문경(聞慶)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탄함을 금치 못하고 유인석·이강년(李康秊)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명을 영솔하여 춘천과 양구(陽口) 사이에서 일본군 80명과 격전하여 적 다수를 도륙하였으며, 이때 아군 5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1896년 여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광무황제의 선유문을 받들어 의진을 해산하고 문경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이어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해산군인들이 각지의 의병에 합세하여 의병운동이 활기를 더해갔다. 이에 1907년 9월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의병장 이은찬(李殷瓚)과 이구재(李九載)가 해산병 80명이 포함된 500명의 의병을 소모한 후 이인영을 찾아와 의병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하였다. 이인영은 “나도 창의(倡義)의 뜻을 품은 지는 오래 되나 부(父)가 병상에 누워 있어 기거를 사람에 의지해야 할 형편이므로 차마 가정을 떠나지 못할 정리라” 하였다. 이에 이은찬은 “이 천붕지복(天崩地覆)의 난을 당하여 국가의 일이 급하고 부자의 은(恩)이 경한데 어찌 사사로써 공사를 미루리오” 하면서 4일간 그곳에 머물면서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이인영도 드디어 승낙한 후 강원도 원주로 출진하여 관동창의대장에 오른 후 사방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격문이 자자구구마다 비분강개에 차 원근으로부터의 응모자가 날로 불어났다. 이때 소모의 방법은 사람을 시켜 마을마다 격문을 보내어 일반에게 알리고 응모자를 비밀리에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이었다.

소모에 응한 의병이 수천 명(해산병 200명 포함)에 달하자 우선 급한 것은 식량과 자금 문제였다. 일부 무고한 양민의 미곡을 탈취하여 의병운동 자금으로 유용하고자 하는 무리도 있었으나, 그는 “가련한 창생에게 참해(慘害)를 주어 기한(飢寒)에 떨게 하는 것은 차마 우리들이 할 바가 아니오. 또 의병이 할 행위가 아니니, 우리는 오직 천의(天意)를 대신하여 그들 매국노 5간 7적(五奸七賊) 및 신협약을 체결하는데 부화뇌동한 현 내각원(內閣員) 등의 불의의 재보를 빼앗아 군자(軍資)를 도울 뿐이라” 하여 매국노들의 재산을 빼앗아 의병활동에 충당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인영이 관동창의대장에 오르자 그의 공평한 인품을 흠모하여 원근에서 그를 따르는 의사가 계속 모여들어 군세는 더욱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이인영은 원주를 떠나 횡성·지평·춘천을 왕래하며 8도의 의병규합에 진력하면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발하여 1907년 11월에 각도의 의병 부대를 양주로 집결하도록 하였다.

원주를 버리고 양주를 8도 의병의 집결처로 한 것은 원주 땅은 교통이 불편하여 대사를 도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병(用兵)의 요결은 고독(孤獨)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데 있은즉, 각도 의병을 통이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로 경기 땅을 쳐들어가면 온 천하는 모두 우리 것이 안 되는 것이 없고, 한국문제 해결이 있어서 유리할 것이다.” 즉, 이인영은 이 격문에서 고립적인 의병항쟁을 지양하고 대동단결의 힘으로 서울을 공략하여 의병들의 최후 목표를 달성하고자 호소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에 앞서 1907년 9월(음력) 원주에서 관동창의대장의 이름으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하였으니 해외동포에게 보낸 격문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우리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우리의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서 전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우리는 모두 일본놈들과 그들의 첩자, 그들의 동맹인과 야만스런 제국주의 군인을 모조리 죽이는데 힘을 다해야 한다.-광무 11년(1907년) 9월 25일. 대한관동창의대장 이인영”

또한 김세영(金世榮)을 서울에 파견하여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격문을 발송하였으니 그 격문의 개의는 일본의 불의를 성토하고 한국의 조난(遭難)을 설망하면서 의병은 순수한 애국단체이니 열강은 이를 국제공법상의 전쟁단체로 인정하여 정의·인도를 주장하는 여러 나라의 동성응원(同聲應援)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이 격문은 각국으로 전달되어 항일의병투쟁의 합법성을 국제적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인영의 격문(통문)에 따라 1907년 11월(음력) 각도 의병장들은 속속 양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때 각도의 의병을 거느리고 온 의병장들을 보면, 전라도는 문태수(文泰洙), 충청도는 이강년(李康秊), 강원도는 민긍호(閔肯鎬), 경상도는 신돌석(申乭石), 평안도는 방인관(方仁寬), 함경도는 정봉준(鄭鳳俊), 경기도는 허위(許僞), 황해도는 권중희(權重熙)였다.

그런데 이 가운데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통문을 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방인관은 80명의 의병을, 정봉준은 7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자발적으로 연합전선에 참가하였다. 이때 각도의 의병장들은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 받은 이인영은 각도 의병장과 상의한 후 진명(陳名)을 내리고 각 군의 칭호를 정한 후 전국 연합의병부대 편성에 착수하였다.

황해도의 권중희는 그후 13도 창의대장 이인영의 휘하에 소속케 되어 황해도는 공장(空將)의 도가 되었으므로 허위가 경기·황해도를 지배하고 박정빈(朴正斌)을 황해도의 아장(亞將)으로 삼았다. 확정된 부서는 아래의 표와 같다.

이렇게 구성된 13도 연합의병 부대의 총수는 약 1만명(혹은 8천명)이었고, 그 가운데 정예군이라 할 수 있는 근대적 무기, 즉 양총을 가진 과거의 진위대 병사들 및 기타의 훈련받은 군인이 약 3,000명이었다. 즉 문경으로부터 이은찬과 이구재가 거느리고 온 80명, 강원도의 민긍호의 부하가 약 800명, 강화·청주의 해산병, 기타 경기 각지의 해산병, 기타의 훈련받은 구군인이 양주 집합시 약 3,000명이나 되었다. 이는 해산병과 그 이전의 군인이었던 자를 합한 숫자였다.

그런데 이후 의진의 개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수부 13도 총대장 이인영, 경기·황해·진동 의병대장 권중휘, 군사장 허위, 관서의병대장 방인관, 관동의병대장 민긍호, 관북의병대장 정봉준, 호서의병대장 이강년, 호남의병대장 문태수, 교남의병대장 박정빈이었다. 13도 연합의진은 서울 공략을 목표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들이 11월부터 서울로 진격하여 동대문 밖 30리에서 일군과 싸워 퇴군하던 1908년 2월 초순(음력 1907년 12월말)까지 서울 근교에서 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의 의진의 모습에 대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서로 연락하여 그 성원을 받아 각 도에 격문을 전하고 고기(鼓起)로써 하니 원근 응모자가 주야부절로 모인 자가 만여 인이었다. 이에 있어서 서울로 진군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협약을 취소시키고 국권을 회복코자 하여… 군사(軍師)는 그 군려(軍旅)를 정돈하고 진발(進發)을 준비하였다. 이에 이인영은 각 도 의려(義旅)로 하여금 일제 진군을 재촉하고, 몸소 3백명을 이끌고 먼저 동대문 밖 30리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 군이 이르지 않았는데 일병이 먼저 쳐들어 와 서로 분전하였으나 적에 대적할 수 없어 이에 퇴군하였다.”

본래 연합부대의 계획은 동대문 밖에서 전군이 집합하여 대오를 정비한 후 음력 정월을 기하여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즉 1908년 1월 28일(음력 12월 25일) 의병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 사망의 부고를 받게 되었다. 당시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이인영은 부음을 듣고 곧 후사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자신은 즉시로 문경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군사장인 허위가 친히 300의 정병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이르렀으나 집합하기로 약속한 각지의 의병부대와 연락이 끊어지게 되고, 이 기미를 알게 된 일본군에게 각 처로부터 닥쳐오는 의병부대가 개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연합의진의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병투쟁이 전국적으로 앙양되어가는 가운데 단행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1908년 2월(양력) 이후 서울 근교에서의 의병들의 활약 기사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이인영의 하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후 부친의 장례를 마친 이인영에게 많은 의병들이 다시 거의를 권하였으나, 그는 “나라에 불충한 자는 어버이에게 불효요 어버이에게 불효한 자는 나라에 불충이니, 효는 충이니 하는 것은 그 도가 하나요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국풍(國風)을 지켜 3년 종상(終喪)의 효도를 다한 후 재기하여 13도 창의군을 일으켜 권토중래(捲土重來)의 세력으로 일인을 소탕하겠노라”고 말하면서 유생의 입장에서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후 이인영은 노모와 슬하의 두 아들을 데리고 상주군(尙州郡)에 잠류(潛流)하였다가 다시 충북 황간군(黃澗郡) 금계동(金溪洞)에 이거하여 살던 중 1909년 6월 7일 일군 헌병(憲兵)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 경성감옥에서 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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