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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심상희

여주 북내면 외룡리 출신으로 일찍이 관로에 나가 사과(司果) 벼슬을 지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1896년 초에 의병을 일으켰다. 여주의진을 구성하여 대장이 되었고, 2월 5일 여주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의 동지와 더불어 거사하였다. 이들은 전선(電線)을 끊고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심상희의진은 여주 일대는 물론 충청도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광주와 이천 등지의 의병진과도 연락해 크게 기세를 올렸다. 한편 당시 경기 일대에서는 연합의진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즉, 민승천(閔承天)·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金準) 등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의진은 1896년 1월 18~19일에 백현(魄峴)·장항(獐項) 전투가 있은 다음 2월 13일 이현(梨峴)에서 적의 습격을 받고 군사들이 일시 흩어졌으나 다시 재수습하고 2월 25일 이현으로 집결하였다. 구연영·전구석(全龜錫)·김태원 등이 광주·이천·양근 지방의 포수·민군(民軍)들을 집합하여 거느리고 왔다. 이때 김하락이 심상희에게 연합의진에 대하여 의논하였으므로 여주의진 일부를 보내주었다. 그리하여 연합 병력이 2,000여 명에 이르게 되자 각 부서를 아래의 표와 같이 재편성하였다.

이처럼 심상희를 그대로 여주대장으로 한 것은 심상희의 여주의병이 다수를 점유했기 때문에 완전한 연합군이 형성되지 않고 여전히 심상희의 지휘권이 인정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경기의진은 2월 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을 본진으로 하여 유진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의병대장들의 불화로 인하여 의진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김하락은 영남지방으로 진격하여 여러 의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

한편 제천지역에서는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한 제천(堤川)의진이 결성되어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 그리고 김백선(金伯善) 등이 그 주축으로 활동하면서 심상희의진과 원주의 이인영의진을 합류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심상희는 당시 경기지방 의병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만큼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따라서 제천 진격 등에 대하여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후 일찍이 여주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활약을 도모하지 못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라는 임금의 선유문(宣諭文)을 받고 의병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다시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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