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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종식

명성황후의 척족으로 1861년(철종 12) 여주에서 판서 민영상(閔泳商)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뒤에 충남 정산(定山)으로 이사하였다. 1882년(고종 19)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으나, 1895년 을미사변 등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정산을 중심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동지 규합에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하자 상경하여 황제에게 윤허를 받아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우선 김복한(金福漢)·안병찬(安炳瓚)과 접촉하여 뜻을 모으다가 다시 민영휘(閔泳徽)·민경호(閔京鎬)·김승규(金昇奎)와 함께 상소할 일을 의논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만류하였다. 그러다가 일본헌병대에 행적이 노출되어 상소문마저 빼앗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6년 3월 처남 이용규(李容珪)·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추진하여 정산군 천장리(天庄里)를 거점으로 하여 격문 및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청원문 작성, 군용품(軍用品) 준비 및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때 그는 충청남도·전라북도 지역의 의진과 관계를 맺으면서 의병을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906년 6월 민종식의진은 홍주(洪州) 근처 합천(合川)에서 일대교전을 벌였으나 박창로(朴昌魯)·안병찬(安炳瓚) 등 40여인이 체포되었다. 이즈음 최익현(崔益鉉) 역시 정산에서 의거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민종식의 의진이 형성되었음을 알고 임병찬(林炳瓚)의 건의를 받아들여 호남 태인(泰仁)을 거점으로 하여 활약하게 되었다. 이들은 서로 호남과 호서의진을 형성하여 호응하기로 약조하였다.

이에 가재(家財)를 기울여 거의를 준비하였으며, 드디어 1906년 5월 11일 이용규·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이상구(李相龜) 등과 함께 충청도 홍산(鴻山) 지치(支峙)에서 거의하였다. 이들은 행군하여 서천(舒川)의 구병동(九兵洞)·문장동(文章洞)을 거쳐 서천읍에 이르렀을 때 의병진은 1,000여 명에 달하였다. 또 비인(庇仁)·판교(板橋)를 거쳐 남포(藍浦)에 이르렀을 때 사방에서 호응하는 군사가 1만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을사의병 중 가장 성대한 의진이었다.

특히 서천과 남포에서는 많은 총포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그리고 두 고을의 친일 군수를 감금하고 일군과 접전하여 여러 명을 생포하고 격퇴시켰다. 4일간 남포에서 유진하던 중 보령(保寧)의 우국지사 유준근(柳濬根)이 동참하였다. 이때 의병 해산을 종용하러 온 관군측과 담판이 있었는데, 의병진의 사절을 관군이 억류하였다. 이에 유준근이 적중으로 들어가 의리로 따져 적의 기개를 꺾고 결박되어 있던 사절을 데리고 돌아왔다.

이후 남포에서 다시 보령(保寧)을 지나 결성(結城)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5월 19일 홍주(洪州)로 진격하였다.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대항하는 적군을 격파하고 성중(城中)으로 포화를 퍼부었다. 적군은 거류 일본인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하여 예산(禮山)으로 달아나 홍주성은 의병진의 손에 장악되었다. 입성한 후 민중들을 안심시키고 진용을 정비하여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드리고 피를 마시며 구국전투에 몸을 바칠 것을 맹서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새로이 부서를 확정하였다.

의진이 홍주에 입성하자 신보균(申補均)·신현두(申鉉斗)·이식(李拭)·안항식(安恒植)·김상덕(金相德)·유학자 윤석봉(尹錫鳳)·유호근(柳浩根)·채광묵(蔡光默) 등이 입진(入陳)하였다. 그중 김상덕을 군사(軍師)에, 신보균을 서기에 임명하였다. 모든 군사들을 6대로 나누어 4대문과 각 요소를 지키게 하였는데, 적군도 그날로 홍주 근처에 집결하였다. 4월 27일 적의 총공격으로 피아간에 일대 공방전이 있었다. 처음에 의병진의 전세가 크게 유리하여 35인을 사로잡아 처형하였으나 적군의 정예병력이 크게 증대되었다.

5월 29일 예산 지방에서 곽한일(郭漢一)·남규진(南奎振)의 의진이 홍주성으로 입성, 홍주의진에 합류하여 방비태세를 강화하였다. 이에 일부 부서를 다시 개편하여 접전에 대비하였다.

9일(양력 31일) 새벽 3시경 일본군사가 폭약으로 동문을 부수고 습격해 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참모장 김상덕·채광묵 부자·성재평(成載平) 등 60~70명이 전사하였으며 적군은 300여 명이 사망하는 등 유례없는 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의진은 훈련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병력이 크게 부족하였기 때문에 주요 병력 83명이 적의 포로가 되었다. 민종식 등 일부 의병장은 후일을 기약하고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최익현의 태인의진의 13명과 함께 경성헌병대에 구금되었다. 의병에 참여했던 70여명이 풀려났지만 남규진·유준근·이식·신현두·이상구·문석환·신보균·최상집·안항식 등 의사 9인 및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당하였다. 한편 홍주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의병장들은 6월에 청양 축치(靑陽丑峙), 7월에는 온양 석암사(溫陽 石岩寺), 8월에는 공주 노동(公州 蘆洞) 등지에서 군사 활동을 하였다. 이어서 9월 그믐에 정예 수백 명을 예산 근처에 매복시키고 맹주인 민종식과 함께 한곡(閑谷)의 전 참판 이남규의 집에서 회합하였다.

그리고 민종식을 성우영(成祐永)의 집에 피신시키고 며칠간 의병을 규합해서 10월 5일 예산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고을의 일진회원이 기미를 알고 적에게 밀고하였다. 이에 10월 2일 새벽 적군들에게 포위되어 이용규·곽한일·박윤식·이석락·이남규 등이 체포되어 예산주차소(禮山駐箚所)에 감금되었다. 적군들은 민종식의 거취를 알아내어 발본색원코자 무수한 악형을 가하였다. 홍주성과 예산을 탈출하는데 성공한 민종식은 그 이후 한 달 이상 산속을 전전하면서 피신하였다. 그 동안 이용규·박윤식(朴潤植)은 온몸이 바스러지도록 고문당하였으나 끝내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남규(李南珪)는 아들 충구(忠求)가 고문에 못 이겨 혀를 깨무는 것을 보고 하는 수 없이 자백하고 끝내 숨졌다. 이때 민종식은 이미 은거처에서 탈출한 뒤이기는 하지만 그의 거취가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5일(음) 민종식은 김덕진(金德鎭)과 함께 공주 탑산리(塔山里)에서 잡혀 공주부(公州府)에 이르러 보니 황영수(黃英秀)도 벌써 잡혀와 있었다. 이들은 온갖 고초를 다 겪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오랜 심문 끝에 1907년 7월 2일 민종식은 사형을 언도받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종신유배형이 언도되었다.

7월 26일 민종식이 맨 처음 의거를 상의하였던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이 석방되어 돌아가면서 민종식의 충의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쳤다. “충신 뒤에 또 다시 충신이 있어 열성은 천신을 감응시킬만하오. 계획 없이 착수했다 나무라지 마소. 세상에선 왜 의자(義者)를 원수로 보는가?” 다행히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주선으로 사형이 면해지고 순종이 즉위하여 진도(珍島)로 종신 유배되었으며, 감일등된 지 한 달 뒤인 12월에 황제의 특사로 보석(保釋)되었다. 석방 후의 행적은 전하는 바 없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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