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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긍호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 경성(京城)에서 태어났으며, 광무 원년에 진위대에 들어갔다. 강원도 원주 진위대 고성(高城) 분견대의 정교(正校)로 있다가 춘천(春川) 분견대로 전입, 광무 5년경에 특무정교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 원주 진위대로 전입되었는데, 1907년 8월 5일 마침 원주진위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상경하여 부재중일 때 충주수비대 이궁(二宮)소위 등 19명이 원주수비대를 해산하기 위하여 온다는 보고를 들었다.

이에 그는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거두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 하고, 부하들에게 비상나팔을 불게 하여 약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선 원주 우편취급소를 습격하고 계속해서 일제 경찰을 습격하였다. 이때 순경들이 남산을 넘어 충주로(忠州路)로 퇴각하므로 추격하다가 이궁(二宮)소위들을 만나 세 시간을 격전하였다.

그 후 의병부대를 많은 소단위로 편성하여 제천·죽산·장호원·여주·홍천 등지 일대에서 유격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활약하였다. 민긍호의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강원도·충청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부대로는 허준(許俊)·이경삼(李京三)·김만군(金萬軍)·고석이(高石伊)·김군필(金君必)·이한창(李韓昌)·한기석(韓基錫)·한갑복(韓甲復)·윤기영(尹起榮)·이강년(李康秊)·변학기(邊鶴基)·조인환(曺仁煥) 등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강년의 부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8월 5일 민긍호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사령부는 경성 주재 보병 제47연대 소속의 2개 중대와 기관총 4정, 공병 1개소대로 편성된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여 의병 진압에 나섰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당시 의병들은 현지사정에 맞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일본군의 보고문에 잘 나타나 있다. “지형을 잘 아는 토민의 비호를 받고 있는 폭도의 첩보 근무는 대단히 민활하여 교묘하게 우리 행동을 정탐하여 은현출몰(隱現出沒)하므로, 지대는 원주 도착 후 그 부근의 소탕에 노력하였으나, 수일간 조금도 얻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의병들은 지역민들과 협력하여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8월 12일 약 200명으로 편성된 민긍호의 부대는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접수하였다. 이때 많은 지방민이 의병부대로 지원해 왔으므로 음죽을 거쳐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는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여주·이천·양근 일대에서 의병들은 크나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군사령부는 당황하여 대전·수원 주둔의 일군(日軍)을 이천·장호원·여주 방면으로 증강하고, 서울 주둔 일군을 양근·이천 방면으로 증파하였다. 8월 중순 민긍호는 이강년과 같이 충주 공략의 작전계획을 세운 후 22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우측으로 공격하고, 이강년 부대는 좌측으로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강릉 방면으로부터 약 200명의 의병부대가 응원하였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이강년 부대에 앞서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충주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충주를 점령하지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이천 북방과 산지동(山地洞)에서도 격전을 벌였다. 9월 7일 약 600명의 민긍호 의병부대는 2개부대로 나누어 홍천을 습격하여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9월 10일 약 200명의 의병이 재차 홍천을 기습하였다. 또 나머지 400명의 의병은 낭천군아(狼川軍衙)를 기습공격한 후 그곳 무기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또 20일에는 춘천 남방으로 10리되는 정족(鼎足) 부근에서 약 300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이고, 23일에는 횡성군 봉복사(鳳腹寺)에서 약 350명의 의병들이 일군과 격전을 벌여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민긍호 의병부대는 10월 26일 횡성 둔촌(屯村)에서, 11월 27일에는 홍천 서남 양덕원(陽德院)에서, 12월 8일에는 원주 동북 작곡(鵲谷)에서 계속 격전을 벌여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8년 2월 28일 원주 치악산 아래인 강림(講林) 동쪽 약 10리 되는 등자치 부근에서 적에게 노출되었다. 적군은 강림에서 출발, 사자산(獅子山)·구룡산(九龍山) 방면으로 우회하여 등자치로 접근하였다. 이때 민긍호의 부대는 그 10리 지점인 궐덕리(蕨德里)에 잠복하고 있었다. 29일 오전 11시에 접전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의병 20여 명이 사살되고, 민긍호는 사로잡혀 강림으로 호송되었다.

그날 밤 민긍호의 부하 60여 명이 강림을 습격하여 민긍호를 탈환하고자 하였다. 의병 중의 한 사람이, “우리 대장 민씨는 어디 계신지 소리를 치시오” 하였다. 이에 포박된 민긍호가 도주하자 일군은 그를 사살하였다. 이때 의병 11명이 전사하고 의병진은 북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긍호가 거느린 의병부대는 당시 강원도 일대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의병 부대였다. 그는 강원도·충청도·경상도를 전전하면서 전부 100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군에게 가장 많은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의 기록인 ‘의병 토벌 결과의 개요’ 가운데서도 민긍호 의병부대에 대하여, “각처에 있어서 약간의 폭도를 넘어뜨리기는 하였으나, 폭도의 출몰이 교묘하여 토벌의 효과가 현저하지 못하다”라고 하여 일군들이 그들의 작전 실패를 자인하고 있다. 이는 민긍호 의병부대의 눈부신 활약과 그 전과를 그대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86,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1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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