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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경기 광주(廣州) 출신으로 호는 춘경(春景)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 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 일제를 이 땅에서 구축하기 위해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여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구연영이 양근(陽根)·지평(砥平)에서 300여명, 조성학이 광주산성에서 300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인근 지역의 민중들이 이에 자발적으로 호응하여 농민과 관포수(官砲手)를 중심으로 900여 명의 군사를 규합하였다. 따라서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었는데 창의대장에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各軍都指揮)에 김하락이 선임되었고 그는 중군장(中軍將)을 맡았다.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000여명으로 군세(軍勢)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한편 서울진공을 통해 일제를 구축키로 하고 이를 위해 우선 수원(水原)을 점령하고 주변의 의진과 연합하여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됨으로 인해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에 따라 동 의진은 경북 의성(義城)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그는 동년 4월 의진과 결별하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1897년 기독교에 입문,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엡윗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여주·이천·광주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피체될 때 피살·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국가보훈처, 1990,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7 ;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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