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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이민응

구한말의 지사(志士)이자 자선사업가로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경행(敬行)이며 호는 수춘(壽春)이다.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의 문인(門人)이며 춘천(春川)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습재(習齋) 이소응(李昭應)의 동생이다. 이민응은 2만석에 가까운 재력(財力)을 지니고 1900년경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外絲里)로 이주하여 빈민 구제와 무지계몽(無知啓蒙)에 앞장 선 강개(慷慨)한 지사였다. 여주군에 쌀 3,000석을 기증하여 의창(義倉)을 운영(運營)하게 하였고 자신이 거주하는 마을에도 쌀 3,000석을 출연(出捐)하여 의창을 운영하였다. 또한 소방기구를 구입한 후 의용소방대를 조직 운영하였으며 그때 사용하던 기구들이 현방리 의용소방대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1927년에는 아들 이재정(李載正), 조카 이재경(李載敬)과 함께 군내 유지 561인과 더불어 빈민구제 사업의 일환으로 기동보린사(畿東保隣社)를 창립하여 출자한 기금을 저리(低利)로 대부하면서 농도강습소를 창설, 농총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국치(國恥) 후에는 여주군수 문태선(文台善), 읍장(邑長) 전은하(田殷夏) 등과 함께 전답(田畓)을 모두 일인은행(日人銀行)에 담보로 잡히고 상당량의 자금을 확보하여 만주(滿洲)로 잠입하였다. 그래서 농지(農地)를 구입하고 조선인(朝鮮人)들을 규합해서 농사를 짓게 하는 한편, 민족정기를 고취시켜 조선족 자치구의 기반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마적단을 동원하여 습격하니 문태선 군수가 싸우다 죽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읍장 전은하와 더불어 은밀히 귀국하여 고향 땅에 와서 살다가 해방 후에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사후 주민들이 그 공덕을 기리고자 현방리 공원과 외사리 회관 등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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