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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정광익

조선 고종대의 효자로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성거(聖擧)이다. 8세 때 어머니가 병석에 누우니 근심하여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10세 때는 아버지 병환이 위중하자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어 쾌유하였다. 13세 때에는 아버지의 부스럼이 성종(成腫)하여 악취(惡臭)가 심하였으나 하루에 3번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의원이 딱다구리 고기를 발라야 한다고 하여 구할 방도가 없어 낙담하던 차에 딱다구리가 날아 와서 쉽게 잡아 아버지의 종기를 고치게 되었다고 한다. 16세 때에는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여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드려 회생(回生)하였으며 학질(瘧疾)에 걸렸을 때는 허벅지 살을 잘라 국을 끓여 드려 차도를 보는 등 부모님 봉양에 정성이 지극하였다. 비록 가난하였으나 정성껏 음식을 마련하였으며 계절에 맞는 옷을 해 드렸다. 상(喪)을 당해서는 예제(禮制)를 엄수하고 조심하였으며 3년간 묘소를 지켰다. 학문도 닦아 과거문체에도 능하였는데 평생의 뜻은 녹봉(祿俸)을 받아 부모님을 잘 봉양하는 것이었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니 그 뒤로는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으므로 고향 사람들이 애석해 하였다. 1892년(고종 29) 경기도관찰사가 효행이 뛰어났음을 조정에 계문(啓文)하여 정려가 내려져 가남읍 태평리 마구실마을에 정려문을 건립하였다.

□ 참고문헌 : 『여주읍지』(1899), 『경기도의 효 문화유산과 인물』(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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