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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홍치중

조선시대 생원·진사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司馬榜目)에 보면 여주 출신 양시자(兩試者)가 조수익에 이어 또 한 사람이 등재되어 있다. 홍치중이 그 사람이다.

홍치중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사능(士能), 호는 북곡(北谷)이며, 강원도관찰사 홍득우(洪得禹)의 아들이다. 1699년(숙종 25) 식년 생원·진사시험에 모두 합격하였고, 1706년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2년 조선과 청(淸)은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기 협상단을 파견하여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을 동쪽으로는 토문강(土門江)을 경계로 국경을 정하였다. 같은 해 조정에서는 국경 표시가 제대로 되어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홍치중을 북평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국경 지대를 면밀히 살펴보던 홍치중은 토문강의 수원이 되는 물길이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 나와 다른 지류와 합쳐지는데 이 물길이 두만강(豆滿江)으로 이어지지 않고 북간도의 토문강으로 흘러들어 송화강(松花江)에 연결되고 있음을 알아냈다. 홍치중의 이 조사 보고로 말미암아 조선과 청의 국경이 두만강인지 토문강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그 논의만 분분한 채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홍치중은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에도 다녀왔다. 1716년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가 일본막부의 제8대 쇼오군(將軍)이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3년 뒤인 1719년 4월에 홍치중은 479명의 사절단과 함께 6개월여의 일본 여정에 올랐다.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일본에서는 조선통신사에 대해 어삼가(御三家)에 해당하는 예우를 갖추었다고 한다. ‘어삼가’란 천황의 근친을 일컫는 말로 조선의 3정승에 비길 수 있었다. 사절단의 대표격인 정사 홍치중, 부사 황선(黃璿), 종사관 이명언(李明彦)의 식탁에는 아침저녁으로 753가지의 반찬이 올라 왔고 점심에도 553가지의 반찬이 마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 국왕의 수라상이 12첩 반상으로 장과 찜, 국을 포함한다 해도 30가지를 넘지 못했으니 이를 보더라도 일본인들의 대접이 매우 융숭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1729년(영조 5) 홍치중은 탕평책을 추진하던 영조의 신임을 얻어 영의정이 되었다. 이무렵 영조는 정국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기 위해 쌍거호대(雙擧互對) 방식을 적용했는데 예를 들어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은 뒤 소론의 이태좌(李台佐)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판서에 노론 김재로(金在魯), 참판에 소론 송인명(宋寅明), 참의에 소론 서종옥(徐宗玉), 전랑에 노론 신만(申晩)으로 상대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홍치중이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영조실록』, 『사마방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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