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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전쟁의 상흔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 속상함이 지나쳐서 이명증(耳鳴症), 편허증(偏虛症), 기류주증(氣流注症), 인음증(引飮症) 등의 병통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약방제조로서 어의(御醫) 양예수(楊禮壽), 허준(許浚)을 데리고 임금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살피면서 진료를 했던 사람이 홍진이다.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희고(希古)이며 호는 인재(訒齋) 또는 퇴촌(退村)이다. 또한 기천서원에 배향된 명유(名儒) 홍인우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였다. 정자·검열·정언·헌납·응교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호군(護軍)으로 어가를 호종하였고 좌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로 임금을 측근에서 모셨다. 이후 한성판윤·대사헌·이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지중추부사·좌참찬·형조판서·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이 갈팡질팡하던 끝에 평양에서 의주로 행선지를 정하고 이항복으로 하여금 함께 갈 신하들을 모으게 하였다. 이항복이 넌지시 물으니 홍진은 울면서 “우졸한 서생이 설사 동쪽으로 돌아간들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군부(君父)옆에서 죽는 것만 못하다. 마땅히 어가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홍진은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되고 당흥부원군(唐興府院君)에 봉해졌다. 홍진은 키가 다섯 자가 채 못 되는 단신에다 코주부였다. 지금 전하고 있는 그의 영정에도 코가 특징 있게 그려져 있다.

홍진은 1616년(광해군 8) 12월 7일 죽었다. 그의 졸기에 “방정하고 강개(剛介)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서는 즉시 홍문관에 뽑혀 들어가 정자가 되었고 청현직을 두루 거쳐 사림의 추증을 받았다. 임진년 변란 때에 임금을 수행하여 충성과 노고가 가장 현저하였다. 이조판서를 네 번이나 거쳤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성품을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광해군 때에 정치가 어지럽자 겸대한 직책을 모두 버리고 문을 닫아걸고 들어 앉아 손님도 받지 않고 지내면서 오직 서사(書史)로 스스로 즐겼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퇴촌유고(退村遺稿)』가 있고 시호는 단민(端敏)이다. 묘는 대신면 계림리에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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