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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하

효종은 머리에 난 종기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승하하였다. 이 일로 어의(御醫) 신가귀(申可貴)를 사형에 처하고 다른 의원들도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다. 이때 궁궐 내의 의료를 관할하는 약방(藥房, 내의원)의 책임자가 원두표요, 부책임자가 홍명하로 둘 다 여주 사람이었다.

홍명하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大而), 호는 기천(沂川)이고, 병조참의 홍서익(洪瑞翼)의 아들이다. 1630년(인조 8) 생원이 되었고,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649년 이조좌랑·경기암행어사, 1652년(효종 3) 동부승지, 1659년 약방제조로 있던 중 효종이 승하하자 삭직되었다가 1663년(현종 4) 우의정, 1665년 좌의정, 1667년 영의정이 되었다. 홍명하는 생원이 된 후 14년 동안이나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고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한 살 위인 처남 신면(申冕)과 손아래 동서 김좌명(金左明)의 구박이 자심했었다. 이를 걱정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아들 신면에게 누차 타일렀으나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홍명하가 문과에 급제하여 탄탄대로의 벼슬길에 올랐을 때 처남 신면이 김좌점(金自點)의 옥사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게 되었다. 효종이 특별히 홍명하를 불러 신면의 참형에 대하여 자문을 구하였는데 홍명하가 대답하기를 “신면은 신의 처남이긴 하나 자주 면대하여 깊은 심정의 대화를 나눈 일이 없으므로 사람의 인품을 헤아려보지 못하였사오니 어의에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적극적인 구명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신면은 국문 도중 장형(杖刑) 끝에 죽게 되는데 『효종실록』에는 “신면이 형신을 받다가 얼마 후 지레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667년 12월 27일 홍명하가 죽었다. 이듬해 7월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고 상신 홍명하는 일생을 청렴하고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가난하여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제사 때에 쓸 물품을 내려주게 하고 녹봉을 3년 동안 더 내려주라 하였다. 저서로는 『기천집(沂川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는 흥천면 문장리(文章里)에 있다.

□ 참고문헌 : 『인조실록』, 『효종실록』, 『현종실록』, 『대동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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