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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구

조선 인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양, 자는 원로(元老), 호는 나재(懶齋)이고, 병조참의를 지낸 홍서익(洪瑞翼)의 아들이며 영의정 홍명하(洪命夏)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였던 홍명구는 8세 때 이웃에 살던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집에 놀러 갔다가 이항복의 권유로 시 한수를 지었는데 “정승이 한가로이 일이 없으니 다만 꽃나무만 심을 줄 아누나” 하니 이항복이 깜짝 놀라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홍명구는 1619년(광해군 11)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시골에서 은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교리·이조좌랑·우승지·대사간·부제학이 되었다. 1635년(인조 13) 12월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이른바 병자호란을 맞았다. 당시 동북아 최강의 기병을 자랑하던 청(淸)이 10년 전 정묘호란 때 경험한 조선군의 산성방어전략을 역이용하여 빠른 기동력으로 국경을 넘은 지 5일 만에 한양에 도달했다. 이들의 신속한 움직임에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다.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지키던 홍명구는 적이 곧바로 한양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별장 장훈(張壎)에게 2,000기(騎)를 주어 구원하게 하는 한편 자신은 날랜 포병 3,000명을 선발하여 진격을 독려하였다. 급히 남하하던 홍명구는 금화(金化)에서 적의 대병과 부딪쳐 적 수백 명을 사살하고 몸에 3대의 화살을 맞아가며 분전한 끝에 전사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아 휘하 장병들이 힘껏 싸워 적을 물리치니 병자호란 중에 적을 이긴 싸움은 이 전투와 김준룡(金俊龍)의 광교산(光敎山) 전투뿐이었다. 홍명구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는데 임금도 울면서 “내가 평소에 그의 사람됨을 알았다. 이렇게 나라가 결단 난 때에 단지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고 이조판서에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인조가 홍명구를 가상히 여기는 것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638년 홍명구의 노모가 죽자 관곽과 역군을 보내주도록 하였으며, 1639년 홍명구의 처자를 공신의 집안으로 대우하게 하고, 1641년 아들 홍중보(洪重普)를 영릉(英陵) 참봉에 임명하였다. 또 1649년 인조가 죽기 직전에는 홍명구의 손자 홍득기(洪得箕)를 효종의 둘째 딸인 숙안공주(淑安公主)의 부마로 삼았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동생 홍명하와 함께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고 묘는 금사면 이포리에 있다. 1760년에 편찬한 『여주목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 『인조실록』, 『여주목읍지』(1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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