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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신

1783년(정조 7) 7월 10일 임금이 춘당대에서 추도기(秋到記)의 시험을 보여 제술(製述)에서 수석을 차지한 여주 출신의 생원 한상신에게 급제를 내렸다. 두 달 뒤인 9월 18일 한상신은 정시문과의 전시(殿試)에서 또 장원을 하였다.

한상신의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덕여(德汝)이다. 윤휴, 송시열 등과 교유가 깊었던 여주 사람 한여해(韓如海)의 5세손이자 한건유(韓健維)의 아들이다. 경전을 연구하여 성리학에 밝았고 일찍이 문장을 이루었다. 178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한 후 강제문신(講製文臣)으로 초계(抄啓)되었으며 임금의 교서를 작성하는 지제교로 선발되었다. 1785년 11월 24일 지평으로 있던 한상신이 ①임금은 잠시의 기거(起居)나 심상한 일에도 몸소 바르게 실천하여 세자가 우러러 본받게 할 것 ②사람의 임용은 지벌(地閥)의 고하와 문장의 우열에만 의존하지 말고 재주 있는 한미한 족속(族屬)에게도 기회를 줄 것 ③임금에게 관계되는 일이라도 머뭇거리지 말고 지적할 수 있는 바른 언로(言路)를 열 것 ④임금이 몸소 절약과 검소를 실천하여 백성들을 교화시킬 것 등을 아뢰어 정조로부터 “그대가 대직(臺職)에 새로이 들어온 초기에 언사(言事)의 상소를 해냈으니 나는 매우 그대를 칭찬한다”는 말을 들었다. 1792년 9월 이가환(李家煥)이 사간원대사간에 임명되자 반대 상소가 잇따랐다. 한상신도 상소를 올려 거들었다. 그러나 상소문 중에 임금이 중용을 벗어났다는 한상신의 지적에 분노한 정조는 마침내 한상신을 평안도 옥강(玉江)의 만호(萬戶)로 내쳤다. 이후 실록에서 한상신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주 한씨 문정공파(文靖公派) 학행록에 한상신이 36세에 죽으니 시론(時論)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 참고문헌 : 『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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