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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정

조선 성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소요재(逍遙齋) 또는 사숙재(私淑齋)이다. 오위사정(五衛司正) 최중생(崔仲生)의 아들로 이천의 대월에서 출생했다. 1461년(세조 7)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으로 발탁되었다. 1466년 문과중시에 3등, 발영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의 혜택을 입었다. 『삼국사 절요』와 『동문선』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 공로로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1478년(성종 9) 3월 5일 여주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1479년 여주목사 최숙정의 실정(失政)이 임금에게 보고되었다. 여주에 조사관으로 파견되었던 집의(執義) 김여석(金礪石)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명을 받고 여주에 가서 창고에 있는 곡(斛, 곡식을 되는 그릇) 4개를 보았는데 14두(斗)들이가 1개, 15두들이가 1개, 14두 5승(升)들이가 2개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나누어 줄 때는 소곡(小斛)을 쓰고 거둬들일 때는 대곡(大斛)을 쓴 것이 확실합니다” 하였다. 즉 백성들에게 곡식을 적게 내려주고 많이 거두어 들여 착복했다는 것이다. 이 죄는 장(杖) 100대와 고신(告身)의 추탈에 해당한다고 사헌부가 아뢰자 성종이 “최숙정은 일찍이 경연관이 되어 그 사람됨이 쓸 만하였고 또 여러 대신이 모두 최숙정이 치민(治民)의 공효가 있다고 말하니 하나의 작은 일을 가지고 갑자기 파직할 수 없다”고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간들이 계속 벌 주기를 청하자 3월 1일 최숙정의 파직을 명했다. 이듬해 4월 최숙정은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아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는데 9월 2일 갑자기 죽었다. 저서에 『소요재집(逍遙齋集)』이 있는데, 그 속에 여주의 아름다운 노래한 「여강팔영(驪江八詠)」이 전하고 있다. 1899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세조실록』, 『성종실록』, 『중종실록』, 『여주읍지』(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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