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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로 보는 여주시사

임윤지당

조선 정조대의 여성 성리학자로 본관은 풍천이고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의 딸이며 증이조판서 윤부(尹扶)의 외손녀이다. 부친이 양성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태어났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되던 해 청주근처 옥화(玉華)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 17세 때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에 와서 살다가 19세 때 원주의 선비 신광유(申光裕)에게 시집갔다. 28세 때 청상과부가 된 윤지당은 생가와 양가의 두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결혼 후 난산 끝에 아이를 하나 낳았으나 어려서 죽었고 그 후에는 자식을 갖지 못하였다.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1793년(정조 17) 원주에서 죽었다. 동생인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가 기록하기를 “나이 열한 살 때 청주 옥화에서 여주로 이사가 살게 되었다. 여주는 번화한 곳이어서 친구들이 밀고 당겨 나도 모르게 방자하게 되었다. 누님이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왜 방심한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고 남들을 따라 다니면서 두레박처럼 오르락내리락 놀기만 하느냐’ 하셨다. 내가 이 말씀을 듣고 깊이 뉘우치고 곧 마음을 바로 잡았다. 누님께서는 순순히 가르치시고 타이르는 성의가 간절하셔서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큰 죄를 면하게 된 것은 실상 우리 누님께서 그때 깨우쳐 주신 덕분이다” 하였다. 윤지당의 둘째 오빠로 성천부사를 지낸 성리학자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는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서 수학하면서 열 살 아래인 윤지당을 가르쳤다. 윤지당은 오빠로부터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 등을 배웠고 5남 2녀였던 형제들과 경전, 사서 등을 강론하였는데 식견이 탁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낮에는 부녀자의 일에 진력하고 밤이 깊어서는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어 공부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가족들도 그녀의 학문 진취를 알지 못하였으나 경전에 대한 조예와 성리학의 이해는 당시의 대학자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윤지당이란 당호(堂號)는 임성주가 지어준 것인데 윤지(允摯)는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를 독실이 신봉한다’는 뜻이다. 이는 주자의 “윤신지(允莘摯)”라는 글귀에서 따온 말로, 신(莘)은 문왕의 부인이었던 태사의 친정 고향이며 지(摯)는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의 친정 고향이다. 태임의 성씨가 임씨(任氏)였으므로 윤지당과 임성주는 더욱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저술로는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가 있다.

□ 참고문헌 : 『윤지당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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