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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 또는 백암거사(白巖居士)이다. 충주목사 이천백(李天白)의 아들로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수찬이 되었다. 1386년(우왕 12) 탐라(耽羅)가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전의부정(典醫副正)으로 탐라에 가서 성주(城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볼모로 데리고 왔다. 1389년(창왕 1)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고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390년에 윤이(尹彛)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후 경연참찬관과 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1392년에는 이조판서로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를 탄핵하였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禮泉洞)에 은거하였다. 1393년(태조 2) 고려조(高麗朝)의 사관(史官)이었을 때 이성계를 무서(誣書)한 죄가 있다고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적몰되고 울진에 귀양 갔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871년에 편찬한 『여주읍지』의 인물편에 등재되어 있다.

□ 참고문헌 : 『고려사』, 『세종실록』, 『기우자집(騎牛子集)』, 『여주읍지』(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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