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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원

산북면 백자리에 보물 제874호인 완양부원군 이충원 교서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된 이충원 영정이 있다. 이충원의 본관은 전주, 자는 원보(元甫) 또는 원포(圓圃)이고, 호는 송암(松菴)과 여수(驢叟)이다. 정종의 제10왕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현손이며 이간(李蕑)의 아들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임진왜란 뒤에 형조참판에 특진되었고 첨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 중에 걸어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으로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 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이 막바지에 접어든 1596년(선조 29) 이충원은 국가의 위기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병법 중에 제33계인 반간계(反間計)를 임금께 건의하였다. “예로부터 강포하기로는 항우(項羽)와 같은 자가 없었으되 끝내 패망하게 된 것은 장량(張良), 진평(陳平) 같은 이가 지모를 써서 간첩을 보내 기미를 엿보아 능히 그 군신의 일을 이간한 때문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카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는 본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공로를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은데 지금이 바로 이 계책을 쓸 때입니다.” 이충원의 반간계가 직접 사용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선조는 그의 계획에 매우 긍정적이어서 도체찰사로 하여금 조처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실록에 사관이 기록하기를 “이충원은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섬겼으며 몸가짐이 지나칠 정도로 검소하였다. 벼슬이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나 담백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고 서법(書法) 역시 묘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묘는 산북면 백자리 절골에 있다.

□ 참고문헌 :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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