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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

조선 영조대의 문신이자 대학자로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호는 도암(陶菴) 또는 한천(寒泉)이다. 우의정 이숙(李䎘)의 손자이고 진사 이만창(李晩昌)의 아들이며 민유중의 외손이다. 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13년 형조참의·성균관 대사성, 1716년 동부승지, 1721년(경종 1)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이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작은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는데 신임사화 때 작은아버지 이만성(李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여 학문연구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1725년 영조가 즉위한 뒤 복직하였으나 1741년(영조 17) 예문관제학을 끝으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김창협의 문인이며 예학에 밝았고 글씨를 잘 썼다. 이재는 성품이 강직한 사람이었다. 1704년 기사관(記事官)으로 있으면서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를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으로 고치도록 임금을 설득한 일은 유명하다.

이재는 1746년 10월 28일 죽었다. 그의 졸기에 이르기를 “이재는 품성이 맑고 순수하며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인망이 당대에 뛰어났었다. 신축년, 임인년의 화가 일어났을 적에 그의 숙부인 판서 이만성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자 드디어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의 설악산으로 은퇴하여 벼슬길에 생각을 끊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을사년 경화(更化) 이후에는 누차 부름을 받았으나 단 한 번 서울에 들어와서 임금을 뵈옵고 만언(萬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입을 다물고 어물어물하는 시론의 폐단을 진술하였다. 하지만 이때에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책에 뜻을 기울이고 있는 참이어서 그의 말을 등한히 여겨 받아들이지 않자 드디어 용인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에 사방에서 배우러 찾아온 자가 매우 많았고 근세의 모든 선비들이 그를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이때에 와서 죽으니 나이 67세였다. 학자들이 도암선생(陶菴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재는 강원도 인제로 가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여주에서 살았다. 저서로는 『도암집(陶菴集)』,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이 있다.

□ 참고문헌 : 『숙종실록』, 『경종실록』, 『영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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